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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살행을 실천할 때 세상이 더 아름다워집니다”

  • 무진등
  • 입력 2023.01.16 15:43
  • 호수 1665
  • 댓글 0

할머니 따라다니며 삶 일부로 정착한 불교…공부 매진하며 점차 잊혀졌지만
결혼생활 계기로 다시금 떠올려…오스트리아서도 ‘금강경’ 독송 멈추지 않아
살면서 받았던 가피, 이웃에 회향하고자 환경운동 시작…최근 에세이도 발간

김종순 전 도림천 아름답게 가꾸기 운동본부장은 최근 보살행을 실천해야겠다는 그의 일관된 원력이 담긴 ‘부모의 사랑은 늘 목이 마르다’를 출간했다. 그는 “진심을 다해 보살행을 실천할 때, 세상이 아름답고 평화로워진다”며 미소지었다.
김종순 전 도림천 아름답게 가꾸기 운동본부장은 최근 보살행을 실천해야겠다는 그의 일관된 원력이 담긴 ‘부모의 사랑은 늘 목이 마르다’를 출간했다. 그는 “진심을 다해 보살행을 실천할 때, 세상이 아름답고 평화로워진다”며 미소지었다.

 

거제도의 불자집안에서 태어난 김종순(80·보리행) 전 도림천 아름답게 가꾸기 운동본부장.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등에 업혀 사찰을 올랐다. 아버지는 유명한 선주였는데 할머니는 이를 모두 부처님 가피라 여겼다. 그는 법당에서 부처님께 연신 절하며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기억했고 가끔 따라하기도 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불교가 일상에, 그리고 가슴에 깊이 자리잡았다. 

학창시절 그는 점차 불교를 잊었다. 학교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공부하기에 바빴다. 지식에 대한 목마름도 갈수록 커졌다. 할머니와 함께 사찰을 오르는 날이 줄어드는 대신 집에서 책에 묻혀 지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일상은 공부로 빼곡이 채워졌고 그는 전교에서 1~2위를 다투는 우등생이 됐다. 

다시 불교를 찾게 된 계기는 결혼이었다. 남편은 시어머니의 보물과도 같았다. 시어머니는 그런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를 질투라도 했던 걸까. 남편은 이를 피해 회사 앞에 방을 얻어 하숙했고 고부관계는 더 엇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딸만 내리 네 명을 출산한 그를 곱게 보지 않았기에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시아버님과 일찍 사별한 시어머니는 아들에 의지해 살았어요. 그런 아들이 어느날 결혼하겠다며 여자를 데려오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당연했겠죠. 그런데 또 딸만 내리 낳다니. 그래서 아들을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복신앙에서 시작됐지만 절실함이 나를 다시 불교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아들을 낳겠다 다짐하고 이웃이 일러준 도봉산 원통사에서 매 순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법당에서는 머리가 바닥에 찧을 정도로 정성을 다해 절했다. 길을 걸으면서, 집에서도 항상 부처님께 “제 말 좀 들어 주이소”하며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때 평생에 걸쳐 손에서 놓지 않게 될 ‘금강경’을 처음 접했다. 수행과 경전공부는 스님만 하는 것인 줄 알았던 그는 매일 ‘금강경’을 읽고 마음속으로 외웠다. 잊었던 불교가 다시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너에게 아들 둘이 생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놀라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이 가까웠다. 절에 갈 준비를 마치고 통행금지 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택시를 타고 산 입구로 향했다. 사찰로 오르는 산길은 너무나도 어두웠다. 무서움에 한 걸음도 옮기기 힘들었지만 부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점차 어둠이 걷히고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당을 쓸고 계시던 스님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사하다는 말을 입속에, 가슴속에서 되뇌었습니다. 아들도 딸도 모두 세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겠다는 다짐도 매일 했습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각자의 개성도 뚜렷했다. 첫째 딸은 공부를 재미있어했다. 또 여섯 남매의 맏이였던 탓인지 책임감도 남달랐다. 직장생활하는 엄마 대신 동생들을 모두 챙겼다. 마치 가정교사 같은 아이였다. 둘째 딸은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성격이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독립심이 강했고 본인의 길을 찾으려 했다. 셋째 딸은 순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누구나 이뻐했다. 매일 동네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넷째는 마이웨이다. 대쪽처럼 곧은 아이였다. 담임선생님에 대한 평가를 정말 솔직하게 노트 한 장 앞뒤를 빼곡하게 적어내기도 했다. 첫째 아들은 장남이라는 책임감을 가진 아이였다. 마음이 선하고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할아버지 기일에 깨우면 벌떡 일어나 제례 준비에 참여하는 그런 아이였다. 둘째 아들은 고집이 셌다. 하루는 윗옷을 벗고 집을 나가 밤까지 돌아오지 않아 온 식구가 찾으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아들은 “밤에 춥지 않은 것을 증명했다”며 호기를 부렸다. 이렇게 개성 강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하루하루가 행복의 나날이었고 웃음소리가 넘쳤다. 모두 부처님 가피 덕분이었다. 

그렇게 평안한 날을 보내던 어느날, 남편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해외특파원 발령을 받았다. 출국이 가까워지면서 이제 절에는 어떻게 가야하나 걱정이 커져갔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도 늘 불교와 함께하던 그였다. 첫째 딸을 위해 오대산 적멸보궁에 올라 기도했고 염주를 항상 손에 쥐고 다녔다. 월정사와 오세암에서 3일 철야정진도 했었다. 이렇게 삶에 깊숙이 들어온 불교인데. 항상 가피를 내려주시는 부처님 은혜 갚기 위해 공양도 꾸준히 올려야 하는데…. 

오스트리아 빈에 사찰이 있을지 없을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다 번뜩 떠올랐다. 만약 절이 없다면 집에서라도 정진하면 된다. 아쉬운 마음으로 ‘금강경’을 소중히 안은 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빈에서도 ‘금강경’을 매일 한쪽씩 읽고 기도를 올렸다. 한국에 있는 자식들이 무탈하기를, 세상사람들 모두에게 부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빈에서 귀국하는 날까지 ‘금강경’과 염주를 놓지 않았어요. 머리맡에 항상 경전을 놓아두었습니다. ‘금강경’ 문구 하나하나를 새겨나가기도 했고요. 지금도 ‘금강경’을 베개 밑에 두고 자곤 해요.”

이렇게 불자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그가 환경운동에 뛰어든 것은 2000년대 초 ‘도림천 아름답게 가꾸기 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으면서다. 당시  도림천은 인근에는 많은 고층 아파트가 건축됐다. 과거 공업지대였던 당시 지어진 혐오시설들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고 하천 바닥에는 쓰레기가 방치돼 있었다. 그럼에도 지방자치단체들은 개선책을 내놓지 않았고 방치했다.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고 유럽에서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자식들도 건강하고 잘 자라주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베푼 것보다 오히려 받은 게 더 많다고 생각했어요. 받았던 복을 이웃들에게 회향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카메라로 환경오염의 주범들을 촬영해 민원을 제기했다. 언젠가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꽃들이 향기를 전하는 아름다운 도림천을 상상하며 매일 발걸음을 옮겼다. 또 하천 양쪽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의 부녀회를 찾아갔다. 부녀회원들은 어려울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거듭 설득했다. 결국 2002년 3236세대가 동참한 ‘도림천 아름답게 가꾸기 운동본부’가 발족할 수 있었다.

회칙을 정하고 본부장, 사무국장, 총무를 정하는 등 조직을 체계화했다. 회의를 통해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기금마련을 위한 1일 찻집을 열기도 했다. 서울시에 3236세대의 서명을 날인한 청원서와 호소문을 제출했다. 2003년에는 ‘안녕하세요. 이명박입니다. 토요일 정오에 만납시다’라는 토요 데이트에 신청했다. 서울시장이 지역 주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 듣는 제도다. 이듬해, 마침내 서울시장과 토요 데이트 날이 정해졌다. 환경전문가의 자문, 민원사항, 회신, 주민들의 의견, 사진자료, 미래 조감도 등 모든 것을 준비했다. 대화는 잘 풀렸다. 시장이 영등포구청 등에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기쁜 마음에 회원들을 안고 빙빙 돌았다. 그러나 끝난 줄 알았던 도림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영등포구청은 서울시가 내려보낸 확정된 예산을 바탕으로 실시설계했다. 그는 실시설계도를 보여줄 것을 구청에 수차례 요구했지만 번번히 묵살됐다. 알고 보니 ‘도림천 유수지 주변 환경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도림천 주변 환경개선 대신 청소시설을 확장하고 있었다.  

구청은 공사 설명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민들도, 도림천을 위한 결과도 아니었다. 그와 주민들은 단체행동을 예고하며 대책수립을 요구했다. 구청직원은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투쟁이 시작됐다.

도림천 인근의 환경 개선을 위해 천막에서 농성하던 모습.
도림천 인근의 환경 개선을 위해 천막에서 농성하던 모습.

천막을 설치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주민들은 저마다 과일, 사골국, 떡, 밥, 죽 등을 가지고 와 함께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천막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위로했다. 애로사항과 의견도 청취했다. 공지할 내용이 있으면 마이크를 잡았다. 집회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에 출두하기도 했다. 무혐의로 결론났지만 너무나 힘들었다. 이런 고생 끝에 마침내 영등포구청은 약속한 사항들을 이행하기로 했다. 부처님이 보살행을 도와주셨다고 믿었다. 

“어느 날 아파트 주민이라면서 전화가 왔어요. 달라진 도림천의 모습에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벌써 20년 전 일입니다. 순탄한 삶은 아니었지만 매순간 최선을 다하니 항상 부처님이 도와주셨어요.”

김종순 전 본부장은 최근 ‘부모의 사랑은 늘 목이 마르다’를 출간했다. 결혼생활부터 도림천 아름답게 가꾸기 운동을 펼치며 마주했던 고난과 극복하기까지 원력으로 일관된 그의 삶이 담겨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부처님을 알려주고 싶어요. 가피 속에 살고 있다는 이 마음, 우리가 보살행을 실천해나갈 때 세상은 아릅답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다른 분들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윤태훈 기자 yth92@beopbo.com

[1665호 / 2023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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