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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이동인 스님이라던 사진 알고보니 딴 인물

  • 교학
  • 입력 2023.01.20 13:30
  • 수정 2023.01.26 15:31
  • 호수 1666
  • 댓글 4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대각사상’ 제38집서 오류 바로 잡아
사진관 스튜디오 촬영한 뒤 1930년대 ‘조선 풍속’ 시리즈 우편엽서로 
우리나라 최초 스님 사진, 퍼시벌이 촬영한 1884년 ‘화계사의 스님들’   

동인 스님 사진으로 오해 받던 사진엽서. 1933년 이후 제작됐다. 하단에 ‘조선풍속 승려 No.142’이 적혀 있다.
동인 스님 사진으로 오해 받던 사진엽서. 1933년 이후 제작됐다. 하단에 ‘조선풍속 승려 No.142’이 적혀 있다.

‘엇, 이건 분명히 이동인 스님 사진인데….’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최근 고양 원각사에서 고문헌과 사진을 조사하다 깜짝 놀랐다. 개화파 이동인(1849?~1881) 스님으로 알고 있던 사진에 못보던 짧은 문구가 있었기 때문. 하단에는 ‘朝鮮風俗(조선풍속) 僧侶(승려) No.142 A PRIEST OF COREAN’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보였다. 한 교수는 의구심이 생겼다.

한상길 교수가 최근 ‘대각사상’ 제38집에서 ‘한국 최초의 스님 사진에 관한 고찰-이동인과 화계사 스님 사진’을 발표했다. 이동인 스님으로 알려진 사진의 실체를 분석하고, 우리나라 최초 스님 사진을 추적한 논문이다.

이동인 스님은 구한말 개항기 ‘조선 혁신을 꿈꾼’ 개화당 일원이었다. 법명은 기인(琪仁), 법호는 서명(西明)이다. 1877년 역사 전면에 등장했지만 1881년 홀연히 사라진 인물이다. 활동 기록은 3년 남짓이다. 그러나 근대기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박규수(1807~1877)와 조선 청년들에게 개화사상을 전했고 유대치(1831~1884?)와 개화파 청년들에게 불교사상을 가르쳤다.

동인 스님은 1879년 9월 김옥균(1851~1894)과 박영효(1861~1939)의 밀촉(密囑)으로 일본에 밀항했다. 외무성 인사는 물론 도쿄에 주재하던 각국 외교관과의 교제를 주도했다.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1842~1896)을 따라 귀국했다 고종(高宗)을 만났고,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에까지 임명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도 못돼 실종됐다. 조선 개화를 막으려던 세력에 의해 암살됐을 거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렇듯 개화사 연구자들에게도 동인 스님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인물.

그런 스님의 '극적인' 존재감을 한층 도드라지게 만든 게 바로 이 사진이다. <사진1> 속 인물은 한 손에 굵은 단주를 들고 반투명 감투를 썼다. 목에 108염주를 늘어뜨렸고 화려한 무늬의 식탁보 위엔 염주 한더미와 세련된 가방, 화병이 올려져 있다.

언론의 기사· TV프로그램은 물론 학술서·논문에서까지 이 사진은 의심 없이 '으레' 동인 스님으로 사용돼 왔다. 한 교수는 “필자 역시 얼마 전까지 별다른 의심 없이 이 사진을 이동인으로 인용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우연한 발견'으로 한 교수는 사진 속 인물을 추적했고 동인 스님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동인 스님이 아닌 근거로 제시한 것은 세 가지다. 먼저 원본 사진이 '엽서'라는 것이다. 가로 14.2㎝, 세로 9㎝ 크기의 이 엽서 하단에는 ‘조선풍속(朝鮮風俗) 승려(僧侶) No.142 A PRIEST OF COREAN’라는 문구가 달려 있다. ‘조선풍속’을 주제로 한 엽서 시리즈의 142번째 주제 승려라는 의미다. 이외에도 ‘No.9 양반’ ‘No.11 기생’ ‘No.63 미인(美人)’ 등 사진엽서의 주인공으로 있다. 더구나 ‘No.9 양반’는 ‘No. 142 승려’와 배경, 구도, 주변 장식까지 똑 닮았다. 

더구나 이 사진엽서는 1933년 이후 촬영,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동인 스님이 자취를 감춘 지 최소 52년 지났을 시기다. 이는 사진엽서 뒷면에서 알 수 있다. 

한 교수는 엽서에 적힌 ‘郵便はʹかき(유우빙하가키)’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1933년 2월15일 체신성령(遞信省令) 제4호로 ‘우편엽서’란 의미의 ‘郵便はかき(유우빙하카키)’에 탁음 ‘ʹか(가)’를 붙여 ‘郵便はʹかき(유우빙하가키)’로 개정했다. 이후 발행된 엽서엔 ‘郵便はʹかき(유우빙하가키)’라는 표기가 있다. 이 엽서에도 ‘ʹか(가)’가 쓰였다. 체신성령이 반포된 1933년 2월 이후 경성에서 제작됐다는 의미다.  

의도적으로 연출된 설정도 동인 스님이 아니라는 근거다. 사진의 주인공은 누군가가 원하는 시각에 맞춰 의도적인 연출을 하고 있다. 한 교수는 “사진관 스튜디오에서 모델이 돼 사진을 찍었다는 게 이동인의 행적과 맞지 않고 시대 상황과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동인 스님이 세상에 기록된 건 1878년 6월부터 1881년 3월, 2년 9개월이란 기간이다. 당시가 격동의 시기라고 하더라도 개화에 반대하던 위정척사 흐름이 대세였다. ‘조선 혁명’을 내세우던 개화파는 사람들 눈을 피해 회합해야 했다. 한양 외곽의 화계사·보문사·봉원사가 개화파 거점으로 활용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구나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동인 스님은 신분을 감추고자 애썼다. 1878년 부산 정토진종을 찾아가 자신을 통도사 스님이라고 했다가 어느 때는 화계사 삼성암 스님이라고 하는 등 소속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일본에 밀항해선 ‘조야계윤(朝野繼允)’ ‘조야동인(朝野東仁)’ ‘조야각지(朝野覺遲)’ 등의 가명을 쓰기도 했다. 그런 스님이 스튜디오에서 의도적 연출로 모델이 돼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분석한다.

어쩌다 이 사진이 동인 스님의 진영(眞影)으로 와전됐을까. 한 교수는 “근대 초 스님의 사회 활동이 드문 현실에서 흑백의 오래된 스님 사진이므로 누군가가 동인 스님으로 오해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더구나 사진엽서 원본이 아닌 하단 엽서 제목을 삭제하고 사진 속 인물만 남겨 놓으면서 의심이나 재론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이 찍은 ‘Buddhist Monks from the Flower Stream Temple(화계사의 스님들)’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이 찍은 ‘Buddhist Monks from the Flower Stream Temple(화계사의 스님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촬영한 최초의 스님 사진이 무엇인지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이에 한 교수는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이 찍은 ‘Buddhist Monks from the Flower Stream Temple(화계사의 스님들)’<사진2>을 제시했다. 이 사진은 서울 화계사 보화루 앞에 세 스님이 합장한 채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다. 다소 경직된 표정이지만 성성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한 교수는 촬영 일자를 ‘1884년 2월23일’이라고 보았다.

고종이 국빈으로 초청한 퍼시벌은 1883년 12월 조선에 입국해 3월 중순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사진을 찍었다. 그는 1884년 2월22일 오후 1시부터 24일 오전 11시까지 화계사에 머무른 것으로 보인다. 퍼시벌은 당시 화계사 스님들을 마주한 뒤 이렇게 적고 있다. “승복 차림의 합장한 그들은 상당히 호감을 주는 표정이었다. 극동(한국과 일본) 승려들의 얼굴에는 사실상 어떤 이유에선지 통상의 교활한 표정을 찾아볼 수 없고, 지혜롭고 선량해 보이기만 했다.”

퍼시벌은 기행문을 정리해 1885년 미국에서 ‘Chosu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a sketch of Korea’(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한국 스케치)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1886년에 이어 1887년까지 연달아 2, 3판이 출간될 정도로 호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출간 당시 ‘화계사의 스님들’은 수록되지 않았다. 뒤늦게 퍼시벌의 후손들이 자료관을 설립하고 그가 촬영한 사진들을 디지털 자료로 전환,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2019년 ‘화계사의 스님’ 사진이 알려지게 됐다.

한 교수는 ‘화계사의 스님’이 우리나라에서 촬영한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화계사 여정에 동행한 인물들을 조사했다. 당시 주미공사관 스쿠더와 윤치호,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이 동행했다. 사서기, 최미산, 이사관, 정사관, 기생 4명과 광대패 10여명, 일본인 요리사 1명도 함께 갔다. 

특히 한 교수는 윤치호(1866~1945)의 일기와 퍼시벌의 기행문을 비교해 화계사에서의 구체적인 일정을 파악했다. 또 이들이 한양 도심에 가까운 정릉 흥천사 등 사찰을 두고 화계사를 찾은 이유에 관해서는 “동행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파 일원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한 교수의 논문은 그간 동인 스님의 진영으로 오해받던 1930년대 사진엽서의 실체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땅에서 촬영한 최초의 스님 사진은 139년 전 퍼시벌이 촬영한 ‘화계사 스님들’이라는 사실도 찾아내 한국 근대불교 실상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한편 퍼시벌이 촬영한 사진들은 현재 미국 아리조나 플래그스태프(Flagstaff)에 있는 로웰천문대(Lowell Observatory) 퍼트남자료관(Putnam Collection Center) 홈페이지 “http://library.lowell.edu/”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66호 / 2023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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