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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겁초의 사람

매순간 내 안에는 ‘겁초(劫初)의 사람’이 살고 있다

겁초의 사람은 주석서에 기세간 성립·파괴 설명과정 중 등장
천상계서 희열만 먹고 살다가 땅의 ‘지미’ 맛본 후 모태 출생
석가모니는 깨달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최후 사람임을 시현

기원 후 1~2세기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
기원 후 1~2세기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

나는 어떤 책을 읽다가 우연히 에덴동산에 머물던 최초의 인간과 관련한 재미있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그에 따르면, 신이 아담을 창조할 때 예수가 죽은 바로 그 나이, 즉 세른세 살의 성인 남자의 치아와 골격구조를 갖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서양의 몽상가들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된 적이 없이 생겨난 이 최초의 사람은 아마도 ‘배꼽 없는 인간’이었을 것이라 상상하기도 한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겁초(劫初)의 사람’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도 모태에 의존하지 않고 사지가 원만한 몸을 갖추고 태어난 자이기 때문이다. 저 배꼽 없는 인간이 기독교인 안에서 낙원의 추억과 원죄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듯, 나는 이 겁초의 사람이 불교도 안에서 무엇을 일깨워주게 될지 궁금해졌다. 지금 나는 그것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지만,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 조금 더 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모태에 의지하지 않고 태어나는 자가 있음을 처음 안 것은 ‘유가사지론’ 주석서를 번역할 때였다. 그곳에서 겁초의 사람이 언급되는 맥락이 조금 색다르다. 유식(唯識)의 교리에 따르면, 나의 식(識) 안에서 내적인 실체처럼 감지되든 외적인 대상처럼 인식되든, 모두 나의 꿈속의 영상이다. 나의 식이 이번 생의 꿈을 멈출 때 안팎의 영상들도 함께 사라지고, 다시 다음 생의 꿈이 시작될 때 함께 주어진다. 그런데 나의 식에서 내 몸은 언제나 살아있는 실체로 감지되지만, 타인은 바깥 자연계의 일부처럼 인식된다. 그래서 옛 주석가들은 ‘타인의 몸은 기세간(器世間: 자연계)에 속한다’고 하였다. 겁초의 사람은 바로 그 기세간의 성립과 파괴에 대한 설명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금 우리가 매일 눈을 뜨면 보게 되는 풍경들 속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자 또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차피 나 또한 타인의 식에서는 풍경 속의 한 장면일 것이기 때문이다.

조사해보니, 겁초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옛 초기 경전들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해놓았고, 다른 불교 문헌에서 그것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오래 전부터 불교도의 보편적인 기억으로 자리 잡은 하나의 신화인 것이다. 그 신화에서는 맨 먼저 출현한 원형의 사람을 이렇게 묘사한다. ‘세계가 무너졌다가 다시 이루어지는 겁[成劫]의 초기에는, 인과응보의 윤리적 법칙에 따라, 무너지는 겁의 최후에 멸했던 고등한 중생들부터 차례로 생겨난다. 맨 먼저 색계의 광음천(光音天: 빛으로 소통하는 하늘)이라 불리는 천상계에서 천중들이 태어나고, 그곳에서 복과 업이 다한 자가 몰하여 아래의 천에 태어나거나 혹은 욕계에 내려와 사람으로 태어났다. 첫 번째 사람은 홀로 외로워하며 다른 사람이 있기를 바라던 차에 마침 광음천에서 인연이 다한 자가 또 한 명 내려와서 두 번째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전생에 무지하기 때문에,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이 자기 뜻대로 만들어졌다고 믿었고,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자기를 만든 자라고 믿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기 뜻[意]으로부터 화생(化生: 변화로 홀연히 생김)한 자이다. 천의 중생과 흡사해서, 온 몸에서 스스로 광명을 발하고, 희열을 먹고 살아가며, 신통으로 공중을 날아다니고, 아주 오래 장수하였다. 외모가 반듯하고 원만한 사지와 감각 기관을 갖추었으며, 무형인(無形人: 남녀의 성기가 없는 자)이었다.’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이러한 원형의 사람은 물론 홀로 심심해하며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할 테지만, 그가 세상의 철학과 예술의 씨앗을 잉태한 저 깊은 암흑과 슬픔까지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비유하자면, 그는 맑은 하늘에서 스스로 빛나면서 무수한 시간을 머무는 태양과 비슷하다. 나는 그 태양을 신성한 존재로 여길 수는 있어도 그것에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나로 하여금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그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를 거친 후에 나타났다. 이들은 모두 다시는 천상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겁초의 사람은 희열만 먹고 살다가 누군가 우연히 땅에서 나는 지미(地味: 녹은 엿처럼 부드러운 유액)를 찍어 먹어 보았다. 그리고는 맛있다고 서로 앞 다투어 먹었다. 많이 먹은 사람일수록 몸이 무거워졌다. 그러자 몸의 광명이 사라지고, 어둡고 미운 빛깔을 띠었으며, 신통을 잃어 날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 지미가 고갈되자 점점 더 거친 음식을 먹었고, 몸 밖으로 찌꺼기를 내보내기 위해 배설기관이 생겨났다. 다시 이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면서 애염을 일으켰다. 이런 업이 무르익어 남자·여자의 성기가 생겨났고, 마침내 사람이 사람을 낳게 되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식탐이 우리들의 근원적 원죄’라는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거친 음식을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천상적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저 애상적인 존재에게서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는 무심한 의지를 보았다고나 할까.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겨났다. 저 원형의 인간은 어째서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천상의 희열식을 두고 땅에서 나는 지미를 찍어 먹어 본 것일까. 어쩌면 그가 심심해서 재미로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하고 상상해본다. 그것이 결국 그로 하여금 이전의 좋은 세상과는 영원히 결별하고 또 다른 세계 속의 불행한 자기를 보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말이다.

이제 유식의 교리 안에서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을 마무리해보겠다. 무시이래로 모든 행위의 흔적을 기록하면서 상속하는 근원적인 식(제8아뢰야식)의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 주어지는 세계의 종말과 창조는 내 숨이 들고 나는 한 찰나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한 찰나 전에 무수한 겁이 흘러갔고, 그 기억을 간직한 식의 종자가 지금 이 순간에 직전과 유사한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현현해낸다. 매 순간 내 안에는 겁초의 사람이 살고 있다. 창조 직후의 그는 또 외로워하며 바깥 풍경 속의 누군가를 곁눈질할 것이다. 그는 홀로 심심해한다. 그래서 홀연히 한 생각을 일으켜, 마치 오징어게임의 1번 참가자처럼 ‘재미삼아’ 우리가 사는 이곳을 대살육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릴 궁리를 할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나는 창조 직후의 사람이 언제나 이전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이후의 나쁜 것을 만들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는 자신의 모든 창조와 파괴를 종결짓고 궁극의 깨달음을 이루었으며, 그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최후의 사람임을 이미 오래 전에 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69호 / 2023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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