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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항일 투사 구세오 스님 활동기록 드러났다

  • 교계
  • 입력 2023.03.02 16:26
  • 수정 2023.03.03 20:22
  • 호수 1671
  • 댓글 1

1922년 4월 ‘동아일보’에 첫 언급
해인사 출신으로 해흥학교서 수학
조선독립 뜻 품고 임시정부서 활동
군자금 9천원 모금해 상해로 전달
강일선 등 친일 밀정 3명을 척살
독립운동 뚜렷하지만 조명 안 돼
“구세오 스님 연구 계기 되길”기대

독립운동가 구세오 스님의 독립운동기록이 언급된 동아일보 1922년 4월28일자 3면 기사.
독립운동가 구세오 스님의 독립운동기록이 언급된 동아일보 1922년 4월28일자 3면 기사.

일제강점기 친일 밀정들을 척살하고,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던 해인사 구세오 스님의 독립운동 활동이 드러났다. 구세오 스님은 뚜렷한 독립운동 활동 이력을 가지고 있지만 독립운동사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다. 

송명호 문화재청 전 근대문화재 전문위원은 최근 1920년대 신문자료를 분석하다 구세오 스님에 대한 기록을 법보신문에 보내왔다. 이 신문자료는 2019년 해인사성보박물관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해인사 스님들을 소개하면서 공개됐지만, 지금까지 구세오 스님에 대한 행적은 전혀 연구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1922년 4월28일자 3면에 수록된 ‘폭탄대원 체포’ 제하의 보도에 따르면 구세오 스님은 이 무렵 독립단 폭탄대와 함께 상해에서 국내로 들어오다 평안남도 강서경찰서에 체포됐다. 당시 25세로,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구석리가 본적이지만, 평양부 신양리 201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은사와 출가 연도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스님은 합천 해인사 출신으로 ‘해흥학교(海興學校)’에서 수학했다. 근현대불교사 분야의 권위자인 김광식 전 동국대 특임교수에 따르면 해흥학교는 해인사 경내에 설립된 보통학교로, 당시 범어사 등 큰 사찰에서 사하촌 주민들을 위해 설립했던 교육시설과 유사한 형태로 추정된다.

구세오 스님은 해흥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조선독립을 염원했다. 그러던 중 1919년 7월 독립투쟁에 직접 나서겠다는 큰 뜻을 품고 해인사를 떠나 중국 상해임시정부를 찾았다. 그곳에서 당시 경호국장이었던 김구 선생 밑에서 경호국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조선독립을 위해 분주히 활동하던 스님은 그해 12월경 임시정부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의 명령을 받아 다시 해인사로 돌아왔다.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금해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라는 밀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세오 스님은 이를 실행하기 위해 당시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봉신 스님과 공모했다. 김봉신 스님은 구세오 스님과 함께 해흥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9년 11월15일 중국 상해에 있던 스님들이 ‘대한승려연합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의 정당성과 스님들의 단결을 호소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에도 이름을 올렸던 인물이기도 했다.

김봉신 스님과 협의를 마친 구세오 스님은 독립단 폭탄대원 정원호 등과 더불어 군자금 모집을 위해 귀국했다. 이어 경상남북도와 기타 지방을 순회하면서 이회광(李晦光)·여도사(呂道士)·박모(朴某)·최성수(崔誠洙)·노민영(盧珉榮) 등 불교계 스님과 인사들을 만나 군자금 명목으로 9000여원을 모금했다. 이후 스님은 이 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다시 상해로 향했다.

이 무렵 상해에는 독립운동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일경에 전달하는 밀정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스님은 이들을 척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곤 상해 프랑스 자치지역[佛國租界]인 어양리의 서병호 집에 거주하던 강일선(康日善), 금강상회 점원 황학선(黃學善), 평안남도에서 온 김정선(金貞善)을 “행동이 수상하고 독립단의 행동을 살피는 자”로 지목하고 차례로 총살했다.

밀정을 척살한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 일이지만, 이 일로 스님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됐다. 실제 국사편찬위에 보관된 일본 외무성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일본 경찰은 ‘행동이 의심스러운 조선인[不逞鮮人]’ 명단을 작성해 수시로 총독부에 보고했는데, 1921년 9월과 12월 상해에 거주하는 ‘불령선인’ 명단에 ‘구세오(具世吾)’라는 이름이 연속으로 등재된다. 이로 인해 구세오 스님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망은 더욱 좁혀졌던 것으로 보인다. 스님은 1922년 4월경 다시 국내로 돌아와 군자금을 모금할 계획이었지만, 경찰에 체포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0년대 초 해인사 대웅전 전경. ('한국불교100년 사진집, 민족사)
1900년대 초 해인사 대웅전 전경. ('한국불교100년 사진집, 민족사)

구세오 스님에 대한 언론 보도는 여기까지다. 이후 어떤 신문에서도 ‘구세오’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구세오 스님의 이후 행적은 확인하기 어렵다. 스님이 경찰 조사 이후 재판에 넘겨졌는지, 어떤 형량을 받아 어떤 교도소에서 복역했는지, 조사과정에서 일경의 고문으로 사망했는지 등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님은 독립운동의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독립운동사에서 조명받지 못하는 인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송명호 전 전문위원은 “밀정을 척살하고, 거액의 독립자금을 마련해 임시정부에 전달한 것만으로도 구세오 스님은 어느 독립운동가 못지 않은 일을 해낸 분”이라며 “그럼에도 독립운동사에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 기록이 독립운동가 구세오 스님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671호 / 2023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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