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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법답게 받아 지님)

기자명 진우 스님

개념에 속아 더 많은 것에 집착하기에 항상 부족함이 따른다

부처님 법 여실히 잘 안다면 죽음 두렵거나 후회하는 마음 없어
욕심내고 화내는 마음은 부처님 법 알지 못하고 신심 부족한 탓
신심 부족함은 연기‧인과‧공에 대해 아직 체득하지 못했단 반증

우리는 적어도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나게 되었고 왜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고 가야 한다. ‘금강경’에는 그 가르침이 명쾌하게 담겨 있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나게 되었고 왜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고 가야 한다. ‘금강경’에는 그 가르침이 명쾌하게 담겨 있다.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 시위다부(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수보리언 심다 세존(須菩提言 甚多 世尊)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아주 작은 티끌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을 여읜 저 언덕 즉 피안(彼岸)과, 오고 감의 분별이 없는 여래(如來)와, 삼라만상의 일체 모든 것이 분별이 없고 머묾이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법(法)의 몸, 즉 법신(法身)에는 문자와 언어가 모두 공(空)하고, 육진(六塵)과 심식(心識)이 공(空)하고, 얻음과 얻는 것이 공(空)하고, 법(法)과 내가 공(空)하였으니, 일체가 돈탕(頓蕩)한 깨달음으로 쓸어버렸으므로, 세계니 신상(身相)이니가 모두 사라졌다.

이러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형상 없는 모든 법상(法相)은 마음의 일이므로 없을 수도 있다 하겠으나, 지금 내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세계의 모든 형체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집착이 다하지 못하고 사량(思量) 분별(分別)이 공(空)하지 못한 대중들은 의심이 가시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의심을 깨뜨려 주시기 위하여 수보리에게 다시 물어서 결론을 지으시려는 것이다. 이에 수보리는 ‘매우 많습니다’라고 대답을 드렸다. 하지만 수보리의 대답은 대중들이 가진 일반적인 생각을 대중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지 진여(眞如) 성품의 경지에서 답을 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 역시 앞에서의 설명과 같이 언설(言說)과 사량(思量)을 떠난 많음은 아닌 것이다.

미진(微塵)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 미진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일시적인 모양을 보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써, 미진(微塵)이 미진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미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미진의 수가 한량없다 해도 한량없는 것 역시 끝이 있을 것이니, 지구의 먼지가 아무리 많다 해도 우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우주의 먼지가 아무리 많다 해도 더 큰 우주에 비하면 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렇듯 많다는 개념에 항상 속아서 더 많은 것에 집착하고 머무는 마음을 갖기 때문에, 항상 모자라는 것이 따르고 부족한 것이 따른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가장 후회되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봄 직 하지 않을까?

호주에서 호스피스로 일했던 ‘브로니 웨어’라는 간호사는 ‘죽을 때 가장 후회되는 다섯 가지’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수년간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보살펴 오면서 그들이 말한 내용 가운데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이 후회가 되는 다섯 가지를 선정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짧게 다섯 가지 제목만 짚어본다.

첫째,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나의 행복을 위해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 것) 둘째, 변화를 두려워한 것.(현실에 너무 안주하고 도전하지 못한 것) 셋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화 낼 때 화도 내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하고) 넷째, 옛 친구와 연락을 끊고 산 것.(바쁘다는 핑계로 인간적인 정을 나누지 못한 것) 다섯째, 일만 너무 열심히 한 것.(가족을 위한다는 핑계로 일을 위한 일만 한 것.)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되고 하나같이 공감 가는 내용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순전히 불교적인 관점에서나 소납의 입장으로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대체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후회와는 별개로, 모두가 아쉬운 인생살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견해에 대해 당연히 존중하고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나게 되었고 왜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이 정도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든다.

‘금강반야바라밀’은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명쾌하고 분명한 부처님의 최상승 법문내용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 물론 잘 이해하고 체득하여 내 것으로 소화한다는 전제하에서다.

죽을 때 후회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후회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부처님 법을 여실히 잘 안다면 적어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된다.

아직도 욕심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무엇에 대해서 이건 못마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부처님 법을 여실히 잘 알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이는 신심(信心)이 부족한 탓일 것이며, 신심이 부족하다는 것은 적어도 연기(緣起)와 인과(因果), 그리고 공(空)에 대해 아직도 체득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니, 더욱 정진에 정진을 거듭할 일이다.

수보리 제미진 여래설 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須菩提 諸微塵 如來說 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모든 티끌은 티끌이 아니요 그 이름이 티끌이며, 여래가 설한 세계 또한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 이니라.”

세존께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먼지가 많느냐 물으심에 수보리가 ‘매우 많습니다’ 한 대답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그 이름이 먼지이고 ‘많다’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상대적인 분별심(分別心)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선 먼지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나타난 나의 상(相)에 불과한 것이고, 이 또한 언제나 변하고 변하여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므로, 먼지가 본래 먼지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또 하나 다른 뜻은, 먼지에 의한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먼지가 음식에 들어간다면? 눈에 들어간다면? 깨끗하지 못하다는 등등의 분별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기분이 생기게 되고, 고락(苦樂)의 분별(分別) 인과(因果)로 인하여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결과를 계속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지에 대해 굳이 분별된 생각과 기분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인연(因緣) 연기(緣起)에 맡기면 될 뿐이다. 그래서 이름이 먼지라고 알고 있으면 된다.

또 ‘삼천대천세계’라는 것 또한 내가 보는 분별된 관점에서 보게 되면, 크다 작다, 많다 적다, 좋다 싫다는 등의 분별된 감정이 생기므로, 이렇게 되면 좋다고 하게 된 그 인과(因果)로 인하여 저렇게 되면 나쁘고 싫다고 하게 되는 과보(果報)가 항상 따르므로, 그 이름만이 삼천대천세계라고 하는 것이고, 정녕 좋고 싫은 삼천대천세계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젯밤 은사스님께서 지병이 도지셔서 서울의 모 대학병원에 모셔 놓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비교적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는데, 습관을 잘못 들였는지 거의 난폭한 운전수준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살짝 화가 나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나의 고락(苦樂) 인과(因果) 업(業)을 생각하고 이내 참았다. 물론 한마디 할 수도 있었고, 언쟁을 할 수도 있었고, 화를 낼 수도 있었고, 변명을 들을 수도 있었으나, 이 가운데 어떤 말과 행동을 선택했더라도, 문제는 나 스스로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쁜 것은 순전히 나의 고락(苦樂) 인과업(因果業)이요, 따라서 오롯이 나의 몫이다.

객관적으로는 택시 기사의 난폭 운전이 잘못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은 바로 나다. 택시기사와의 시비(是非)를 통해 설사 상대를 굴복시킨다 하더라도 나의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은 엄연히 나의 고락(苦樂) 업(業)의 움직임인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대단히 사소한 문제 같지만, 이로 인하여 발생한 나의 좋고 싫은 고락업(苦樂業)이 또 다른 인연과 연결되면서 계속적인 여파가 이어질 것을 생각하면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사건 사고가 계속 이어질 개연성이 있을 뿐더러, 그때마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기분이 크게 출렁일 소지가 충분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참는다는 또는 참아야 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원천적인 나의 고락업(苦樂業)이 모든 문제의 근본임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나의 기분을 흔들어 놓은 상대 또는 대상과는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상대 또는 내가 보는 대상은, 나의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과 육식(六識-육근으로 보고 인식함)에서 감지되는 대상인 육경(六境-물질‧소리‧향기‧냄새‧촉감‧기억)이다.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경(六境)을 감지하는 육식(六識)을 일으키는 것이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은 모두가 한 몸인 것이다. 따라서 상대 또는 대상 또한 나의 몸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상대 또는 대상인 육경(六境)을 통해 육식(六識)으로 감지되는 것은 좋고 싫은 두 가지 분별심(分別心)으로 요약된다. 상대 또는 대상에 대해 좋고 싫은 감정이 드는 것은 순전히 나의 고락업(苦樂業)이라는 말이다. 좋고 싫은 고락업(苦樂業)은 상대 또는 대상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지는 인과(因果)이다. 즉, 좋은 것이 생기는 즉시 싫고 나쁜 것이 저절로 생긴다는 말이다.

따라서 ‘금강경’을 통하여 부처님께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상(相)이다. 상(相)은 분별(分別)이다. 그래서 부처라는, 법(法)이라는,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32상(相)이라는, 이 모든 상(相) 또한 이름뿐이라는 것이니, 그 어떤 상(相)이라도 머물러 집착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71호 / 2023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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