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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법답게 받아 지님)

기자명 진우 스님

삼십이상은 본래 마음속 망념으로 인해 만들어져 상이 아니다

‘좋다‧싫다’ ‘나와 너’ 등의 모든 상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화
진정으로 상이 아닌 것은 상에 고락의 상을 붙이지 않는 것
마음에 일체의 모든 법 두지 않아 구족한 본래 법신 맛 봐야

마음으로 짓는 모든 상은 그 자체가 분별을 낳고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를 계속 낳게 되니, 이는 진정한 마음과 천리만리 떨어진 것이다.
마음으로 짓는 모든 상은 그 자체가 분별을 낳고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를 계속 낳게 되니, 이는 진정한 마음과 천리만리 떨어진 것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느냐? 가히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삼십이상(三十二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을 했거니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눈‧귀‧코‧혀‧몸‧생각) 육근(六根) 등의 형상으로 나타난 모양을 말함이다. 즉, 소리와 모습 등의 형상으로 나타낸 성색불(聲色佛)이다.

청중들은 세계와 미진(微塵-티끌)이 세계와 미진(微塵-먼지)이 아니요, 그 이름이 세계와 미진이라 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개개물물(個個物物)이 다 법신(法身)임을 깨달아 세계와 미진에 대한 상(相)과 마음으로 느끼는 상(相)이 모두 공(空)하여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이자 법신(法身)임을 알아들었으나, 이에는 얻은 자가 있으므로 곧 신상(身相)에 대한 집착함 마저 떨치지는 못한 것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은 완벽한 몸을 말한다. 곧 부처님의 신상(身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을 깨쳐서 모두가 공(空)한 금강반야바라밀을 얻게 되면 부처님의 신상인 삼십이상(三十二相)이 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으면 깨닫는 대로 32상이 될 것이어서 결코 신상(身相)만은 공(空)하지 못할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한편, 만약 깨치지 못한다면 32상의 신상보(身相報)를 얻지 못한다고 지레 짐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상(身相)이 없다면 법신(法身)도 금강반야바라밀도 얻지 못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를 알려주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가히 32신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수보리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이며,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을 하실 것인가?

갓난아이가 혼자서 철없이 놀고 있다. 얼굴과 손과 온 몸에는 온갖 음식물들이 묻혀져 있고, 온 방바닥에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하물며 귀중하게 여겼던 청자병도 깨져 있다. 그래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천진난만하게 깔깔대고 웃으며 놀고 있다.

이를 본 엄마는 은근히 속이 탄다. 귀여운 자식을 뭐라고 야단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그대로 놓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광경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지만, 그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다. 굳이 따지자면 문제를 일으킨 것은 갓난아이였으나, 철모르는 아이가 마음이 불편할 리는 만무할 것이고, 분명 속이 타고 불편한 쪽은 부모일 것이다. 만약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그랬다면 아마도 싸움이 나도 크게 났을 일이다.

여기서 심각히 생각해볼 것은, 잘잘못을 떠나서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나는 쪽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대개는 상대방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서로가 시비(是非)를 가리느라 성을 내기도 하고 화가 나서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마음이 불편하게 되는 것은 상(相)을 가졌기 때문이다. 옳다는 상, 잘못이라는 상, 나와 너라는 상, 싫다는 상, 밉다는 상 등의 모든 상(相)은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화(幻化)일 것이다. 환화(幻化)란 거짓된 마음의 상(相)을 말하는데, 왜 거짓된 것인가? 모든 상(相)은 변하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어서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相)이 생기므로 그 반대의 저런 상(相)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 인과(因果)의 상(相)이다. 인과상(因果相)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상(相)을 낳는다. 그러므로 괴로운 상(相)을 피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거짓된 마음속 환화(幻化)의 상(相)을 가지지 말라고 강조하신다. 설사 부처라는 상(相) 마저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나 진정으로 상(相)이 아닌 것은, 상(相)에다가 좋다 싫다는 고락(苦樂)의 상(相)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얼마든지 이런 상(相), 저런 상(相)을 말해도 좋다. 다만,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분별하지 않고 있는 상(相)을 그대로 보면 된다. 옳거나 그르다는 시비(是非)를 할 수도 있으나, 고락(苦樂) 감정의 분별(分別) 상(相)을 내지 않으면 된다.

하물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화를 내는 동시에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감정 상(相)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갓난아이는 정작 고락(苦樂)의 분별(分別) 상(相)을 내지 않는데, 옆에서 보는 엄마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순전히 엄마의 인과업(因果業)이 스스로 홀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손해일까?

가끔은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경우가 있다. 정작 시누이는 아무렇지 않는데 내가 더 화가 나는 것은 왜일까? 나의 고락(苦樂) 인과업(因果業)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의 최고 가치란, 언제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이 스스로 편안한 것이다. 그러려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 마음공부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으로 해야 할 것은 바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이다. 뭐니 뭐니 해도 나의 업(業)을 멸하는 것만이 모든 일이 저절로 저절로 풀리게 되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하이고 여래설 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삼십이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곧 진짜 상이 아니오라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왜 상(相)이 아니냐 하면, 본래 마음속에 있는 망념(妄念)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지은 거짓된 환심(幻心)은 결국 공(空)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상(身相)과 세계상을 별달리 보는 자는 마음을 신상(身相)속에서 찾는 그릇된 생각을 하는 것이니, 세계와 허공이 모두 마음속에 있는 줄 모르는 까닭이다.

따라서 신상(身相)에 의해 마음이 생기게 된다면, 신상(身相)을 여의고는 금강반야바라밀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어서, 이는 뒤집힌 생각인 것이다. 마음에 의하여 신상(身相)도 있고, 마음을 여의고는 세계도 신상(身相)도 바라밀(波羅蜜)도 없다고 하여야 바른 생각일 것이니, 이 마음속에서는 세계나 신상(身相)이나 바라밀이나 모두가 거짓된 환화(幻化)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진(微塵)이라 해도 아니 되고, 삼십이상(三十二相)이라 해도 아니 되며,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해도 아니 되고, 큰마음이라 해도 아니 되니, 이 모두는 출입(出入)과 대소(大小)와 내외(內外)가 함께 없어져서, 작기도 크기도 하는 거짓된 환화상(幻化相)이 곧 마음인 것이요, 거짓된 마음이 곧 환화상(幻化相)이며, 보화신(報化身)이 곧 법신(法身)이요, 법신이 곧 보화신(報化身)인 것이다.

이로써 마음으로 짓는 모든 상(相)은 그 자체가 분별(分別)을 낳고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계속 낳게 되므로, 이는 진정한 마음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것이니, 이름 하여 진정한 마음의 가치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일체의 모든 법(法)을 두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구족한 본래 법신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소납이 지난 9년 동안 한두 번을 빼고 거의 매일 소위 명상 글을 이른 아침마다 밴드에 올린 이유는, 밴드나 유튜브의 독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자신을 단속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뜬금없이 하는 것은, 어떤 독자 분들은 내용이 어렵다 하고, 거기서 거기인 말을 반복하는 것 이외의 새로운 것이 없다 하는 분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노릇 수십 년을 해왔다 한들, 수 억겁에 걸쳐 쌓여져 온 업장(業障)에서 나오는 탐진치(貪嗔痴-탐심‧성냄‧분별심) 삼독심(三毒心)과, 오욕락(五慾樂-식욕‧수면욕‧재물욕‧성욕‧명예욕), 그리고 번뇌 망상을 깨끗이 지우기에는, 수행력이 역부족이고 태부족인 동시에, 찰나 찰나 한 생각 정신줄을 놓치게 되면, 잘못된 업식(業識)이 준동하여 스스로 불편함의 고업(苦業)을 감당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서이다.

따라서 수행력과 능력이 너무도 모자라는 탓에, 매일 아침 이렇게라도 나 자신의 업상(業相)을 스스로 단속하는 차원에서, 자신에게 설하는 설법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고, 이왕이면 함께 더불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올리는 어설픈 글이라는 것 또한 감안해 주시기를 양해바란다.

매일매일 스스로 이해하고 체득하려는 화두는 단 하나,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머물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즉, 좋고 싫은 고락(苦樂) 분별(分別)하지 말자는 것이 단 하나의 화두(話頭)이다. 그저 말할 뿐이고, 그저 행동할 뿐이고, 그저 그렇게 할 뿐이다.

털끝만큼의 사량분별(思量分別)도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낳을 뿐이다. 그리하여 ‘금강바라밀경’의 부처님 말씀에 눈물이 날 정도로 감응할 따름이다. 이 또한 분별이겠으나, 분별이라는 분별 또한 분별이므로, 항상 방하착(放下着-그대로 놓음)을 시도할 뿐이다.

그리고 항상 걸림의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놓고 또 놓을 뿐이다. 

상대의 험한 말을 듣고 움직이는 감정을 놓고 또 놓는다. 어떤 일이 되었건 잘되고 잘못 되고의 지레 걱정도 놓는다. 단 하나의 의심도 놓는다. 인과(因果) 인연(因緣) 연기(緣起)에 맡길 뿐이다. 그래서 그 어떤 현상이 다가와도 항상 마음을 평화롭게 할 뿐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뜻이라는 것을 늘 잊지 않고 화두(話頭)로 삼고 살아갈 뿐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73호 / 2023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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