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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선 수행 권순석(정혜·53) - 상

기자명 법보

인생 쳇바퀴 허무하게 느껴져
망설임 없이 구도자의 삶 선택
선에 관심 갖고 찾아간 사찰서
법명·화두 받고 공부 본격 시작

정혜·53
정혜·53

학창시절부터 신비주의, 영성, 도가사상에 심취해 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 늙고 병들어 죽는 뻔한 삶이 너무 허무해 보였다. 쳇바퀴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 의미없이 내 삶을 허비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망설임없이 구도자의 삶을 택했다.

명상 붐이 불던 80년대 후반. 영성에 대해 공부할수록 스승의 존재에 대한 간절함이 생겨났다. 그러다 한국의 라즈니쉬라 불리는 분에 대해서 알게 됐고, 뭔가 답을 얻을 수 있길 기대했다. 졸업 후 그 단체에서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하며 두가지 결심을 했다. ‘나에게 주어지는 어떤 일이든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남 탓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약했고 두려움이 많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 앞에 나를 내려놓고 묵묵히 나아갔다. 회사에서는 말단으로 시작해서 대표가 되었고, 단체에서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40대를 앞두고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과연 내가 처음 찾고자 했던 삶의 해답을 찾았는가. 나는 어떤 답도 얻지 못했다. 아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깊은 좌절과 함께 절박하고 조급해졌다. 

‘선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었을 무렵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냄새 맡는 이 놈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하루 종일 그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당시 쌍문동에서 개포동까지 자동차로 출퇴근하며 운전대의 촉감, 라디오소리, 도로위의 전경 등 모든 것을 느끼고 듣고 보는 ‘어떤 것’에 저절로 집중됐다. 그러다 보니 ‘이게 뭔가’ 하는 하염없는 심정으로, 늘 반쯤 넋 나간 상태로 운전하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을 다니던 어느 날, 한남대교를 건너서 경부고속도로 진입로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차량들이 진입로로 모여들면서 앞의 차량들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자 브레이크 등이 눈앞에서 확 켜지면서 의식의 끈이 툭 끊어졌다. 저 하늘위로 끝없이 번져가는 듯한 체험이었다.

그 체험 이후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고, 영성서적을 읽어도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왔다. 알게 모르게 나를 속박하던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자 내가 의지했던 단체의 가르침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게 아니라 통제하고 속박한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미련 없이 그곳을 뛰쳐나왔다. 

선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져 곤지암에 있는 불심정사에 찾아갔다. 만공선사의 법을 잇고, 수덕사 방장이었던 혜암선사로부터 유발상좌시절 전법게를 받은 청봉청운 선사가 법을 펴고 있었다. 스님은 그 당시 작은 암자에서 불사를 준비중이었다. 

스님과의 면담에서 ‘정혜’라는 법명과 함게 오리병 화두를 받았다. 오리병 화두란 “호리병 속에 들어간 새끼오리가 병 안에서 자라는 바람에 꺼낼 수 없게 되었는데, 병을 깨지 않고 어떻게 꺼내겠냐”는 것이었다. 당시 스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노거사님은 “스님께서 비구와 거사를 위한 참선당 이름을 정혜선원으로 정하고 현판까지 미리 써놓으셨다”며 좋은 법명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기도 했다. 

불심정사를 다닌지 몇 개월쯤 지난 어느 일요일 법문 날이었다. 그날따라 법회 중에 스님과 면담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스님이 꼭 찾아오라고 부르는 것만 같았다. 원래 화두가 해결되면 면담을 신청해서 점검 받는데, 사실 화두에 대해서 따로 드릴 말씀이 없었다. 결국 면담 신청을 하고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공부한 걸 내 놓으라”고 하시면서 “오리병에서 어떻게 오리를 꺼내겠냐”고 물으셨다. 나도 모르게 크게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이렇게 오리가 나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스님이 잠시 말없이 나를 보시더니 새로운 화두를 주셨다. 좀 특이한 화두였는데, 스님 당신의 모습을 내 마음 속에 넣으라고 하신 뒤 내 마음 속에서 당신을 어떻게 꺼내겠느냐는 것이었다. 잘 참구해보라고 하셨고, 졸지에 나는 스님을 내 마음속에 간직한 채 돌아 나왔다.  

다음날 새벽.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스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다. 평소 지병이 있으셨던 스님. 어제의 면담 순간이 떠오르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황망한 가운데 장례를 마치고, 마음속에 스님을 묻은 뒤 또 다시 행각에 나섰다.

[1673호 / 2023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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