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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시닝(西寧) 타얼쓰(塔爾寺)

기자명 이재형

라싸 가는 길 1800㎞ 온 몸 내던지는 순례자들


<사진설명>석양에 차 그림자가 길게 누울 무렵 길 위에서 만난 한 수행자는 오체투지로 라싸를 향하고 있다.

사막의 섬 둔황, 여기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생애 다시 한 번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요한 둔황이 어둠에서 깨어나고 있다.

오늘은 둔황으로 올 때와는 달리 남로를 택했다. 칭하이성(靑海省)의 성도 시닝(西寧)을 거쳐 란저우(蘭州)로 이어진 길이다. 둔황을 벗어나 한 시간 정도 달리니 멀리 당진산(當金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 산의 정상은 3535미터로 이 곳을 기점으로 칭하이성의 고원지대가 시작된다.

차가 산비탈을 오를수록 사막의 무더위는 사라지고 서늘한 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온도계를 들여다보니 영하 5도다. 다시 1시간 30분 정도 달려 정상에 오르자 탈쵸(Tharchog)에 걸린 오색의 룽다(Lungda)가 산악의 매서운 바람에 거세게 펄럭인다. 탈쵸는 우리네 솟대와 비슷한 것으로 산등성이나 마을어귀에 나무로 만든 높다란 기둥이다. 여기에 불교 경전을 오색의 천에 찍어 다발로 엮어 걸어 놓는 것이 룽다다. 한족의 문화와는 다른 티베트 문화의 전형으로 칭하이성에 들어섰음을 실감나게 한다.

<사진설명>티베트 겔룩파의 종조 쫑까파 스님의 탄생지 타얼쓰. 이곳은 여전히 수많은 티베트 민중들의 위안처가 되고 있다.

사실 칭하이성은 티베트고원의 동북에 위치해 있는 내륙성으로 명나라 때 중국에 편입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티베트 등 이민족들의 땅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이 성(省)의 42% 가량이 소수민족들로, 특히 티베트 문화의 영향이 깊이 뿌리내린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쿤룬(崑崙)·치롄(祁連) 등 높고 험한 산맥 탓에 평균 해발 고도가 3000미터에 이른다. 당진산을 넘자 드넓은 평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한 회오리바람인 토네이도가 불어와 폐허가 됐다는 가옥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길가에 잠시 정차한 채 준비해간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끊는 물을 넣어도 면이 제대로 익지 않는다.

창양가쵸의 비애 서린 칭하이호

차는 물방개 등짝처럼 검은 아스팔트 위를 다시 내달렸다. 차장 밖의 세계가 완전히 별천지다. 흙빛이 어떻게 저렇게 다양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검은가 하면 푸르고 때론 회색에 노란 색조를 띠기도 한다. 거기에 하늘 빛깔은 또 어떤가. 마치 어린 시절 도화지에 파란 물감을 꾹 짜 그려놓은 듯 눈이 시릴 정도로 온통 푸르다. 그런 그림 같은 풍경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끝없이 나아갔다.


그렇게 하루 종일 달렸다. 해는 점점 서녘으로 기울고 색다른 풍경들이 눈에 익을 무렵 칭하이호(靑海湖)가 보이기 시작했다. 해발 3195미터로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이곳은 그 크기가 무려 4635㎢로 서울의 7배가 넘는다. ‘푸른바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멀리 아득하니 수평선이 보인다. 칭하이호는 티베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제6대 달라이라마 창양 갸초가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다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

‘어여쁜 임을 따르려니/ 깨달음의 길 걷기 힘들고/ 깊은 산속에서 수행하려니/ 임을 그리는 한 조각 마음이 걸리네./ 지성을 다해 떠올리는 부처님 얼굴은/ 도무지 마음 속에 보이지 않는데/ 생각지 않으려는 임의 얼굴은 더욱 더 또렷이 떠오르네./ 내 마음을 온통 빼앗은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맺어질 수 있다면/ 그대는 바다 속 가장 깊은 바닥/ 그 곳에서 건져 낸 예쁜 보석이리.’

선택된 승려의 길보다 한 평범한 젊은이기를 원했던 창양 갸초. 그의 오래된 죽음이 푸른 호수의 물안개마냥 어려 있는 길을 달리고 있을 때다. 멀리 한 사람이 일행들의 눈과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30대 중반 쯤 됐을까. 햇볕에 그을린 까만 얼굴에 허름한 옷, 양손을 모아 머리 위로 합장 하고 다시 가슴에 댄 후, 바닥에 온 몸을 던지는 오체투지를 반복하는 순례자였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에서 그는 왜 그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에 땀방울을 떨구는 것일까. 사진을 찍자는 말에 잠시 환히 웃어 보이는 그를 뒤로 하고 다시 달렸다. 10분쯤 갔을까. 이번에는 나이든 아주머니 한 명과 젊은이 등 5명이 오체투지 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표정이 밝고 즐거워 보였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라싸까지 간다고 했다. 아! 라싸. 그곳까지는 약 1800킬로미터다. 빨리 걸어도 두 달은 족히 걸릴 거리다. 그 험한 길을 그들은 삼보일배를 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깊은 경외감에 가슴 밑바닥부터 뜨거운 그 무엇이 솟구쳐 오른다.


<사진설명>엄마를 따라 사찰을 찾은 티베트 꼬마.


쫑까파 스님의 고향 타얼쓰

1949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가 자기들의 영토라고 선언하고 라싸로 진군함에 따라 티베트인들은 설 곳을 잃었다. 결국 10년 뒤 달라이라마도 인도로 망명하게 되고 남은 이들은 숱한 학살과 핍박을 견뎌야 했다. 6000여 개의 사원들이 파괴되고 15만 명의 스님들은 강제로 환속 당하거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빼앗긴 것은 땅과 주권이지 마음은 아니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이, 삼보일배를 하며 성스러운 땅 라싸로 나아가는 이들에게서 티베트의 정신은 펄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석양에 차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다. 달리는 차 뒤로 그들의 모습이 점처럼 스러져간다. 다시 몇 시간을 달려 밤 11시 30분 쯤 돼서야 시닝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피곤함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불교는 티베트 민중들의 버팀목

간밤에 달라이라마의 꿈을 꿨다. 지난 밤 삼보일배 순례자의 탓이었으리라. 오늘은 점심때께 출발한다는 말에 스님들과 함께 가까운 타얼쓰(塔爾寺)를 찾기로 했다. 타얼쓰는 겔룩파를 창종한 인물인 쫑까파 스님의 태반이 모셔져 있는 사찰로 티베트인들의 성지 중 하나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굽이굽이 난 도로를 30분 정도 가니 마침내 사찰이 나타난다.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다. 탑만해도 수백 개는 될 듯하고 거대한 규모의 전각들도 많다. 법당 주변과 안은 티베트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도 있고 열심히 절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여인들과 노인들은 물론 젊은이들도 많다. 모두들 한결같이 가난에 찌든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비굴함은 찾아볼 수 없다.


<사진설명>삼보일배를 하는 티베트 젊은이들. 그들의 모습이 해맑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하나 있다. 구멍 난 양말에 무릎이 헤진 옷을 입은 열 살 남짓 된 꼬마는 무엇을 비는지 어른들 사이에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과 손, 그러나 아이의 진지한 표정이 아름답다 못해 성스럽다. 한 스님께 여쭤보니 600여 명의 스님들이이곳에서 수행에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힘없는 민중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법당 밖에 깡통을 놓고 구걸하는 늙은 맹인 부부의 모습이 위대한 수행자의 얼굴마냥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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