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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0)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6)

의상은 도선의 계율 준수함으로써 청정한 비구 생활 지키려 노력

의상이 지엄문하서 공부할 때 다른 종파 불교 섭렵했을 것
스승 지엄 따라 도선과 교류하며 영향 받았을 것이 확실시
의상이 계율 철저히 지켰다는 ‘송고승전’ 기록 등도 뒷받침

의상이 철저하게 준수했던 계율의 내용은 사분율을 위주로 하는 도선의 남산율종을 통해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은 남산율종 개조 도선율사 진영.
의상이 철저하게 준수했던 계율의 내용은 사분율을 위주로 하는 도선의 남산율종을 통해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은 남산율종 개조 도선율사 진영.

신라 화엄종의 창립자인 의상의 불교사상에서 지론종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여 앞 회에서는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를 중심으로 한 지론종 남도파 계통의 인물들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화엄종의 학계는 혜광-도빙(488∼559)-영유(518∼605)-정연(544∼611)-지정(559∼639)-지엄(602∼668)으로 상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엄과 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도선(596∼667)의 ‘속고승전’과 지엄의 제자인 법장(643∼712)의 ‘화엄경전기’에서는 지엄의 법계가 지론종의 지정(智正) 대신에 실천적 교화승인 두순(杜順,557∼640)을 상승한 것으로 공인되고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송고승전’에서는 두순전을 감통편(感通篇)에 편입하였는데, 교학이나 실천보다 교화의 능력을 소유한 인물로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은 두순전에서 두순이 하나의 교단을 조직하기에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보여주는 교화의 실적과 신이한 행적의 사례들을 서술하였다. 나아가 두순이 교조의 자질을 갖추었고, 지엄과 사제관계에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두순전에 지엄의 전기를 부전으로 붙이면서 두순의 불교를 잘 계승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끝맺었다. 그 밖에 법장의 ‘화엄경전기’ 지엄전에서 두순과 지엄을 부자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사실까지 아울러 감안하면 당시에 이미 두순을 지엄의 스승으로 하는 화엄종의 조통설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이로써 오늘날 불교사학에서는 지론종 계통의 사상적 체계와 두순의 종교적 실천이 지엄에 의해 종합되어 화엄종의 종파로서의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그리고 그를 이은 법장의 대에 이르러 대성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화엄종의 초조로 추앙되는 두순은 주로 사람들을 교화하고 상하의 신앙을 모으는 방식으로 능력을 발휘하여 교단의 토대를 구축하였음은 확실하다고 보며, 그의 중심적 행법이 ‘화엄경’의 독송과 보현행의 실천이었음도 분명한 것 같다. 법장의 ‘화엄경전기’ 두순전에서 번현지(樊玄智)가 16세에 두순의 문하로 들어가자, “‘화엄경’을 독송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하고 그 경전에 따라 보현행을 닦기를 권했다”고 한 기술이 그것을 방증하는 사례이다. 그러나 화엄종의 성립과정에서 두순이 세운 가장 큰 공적은 지엄을 후계자로 양성하여 화엄의 보현행을 계승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화엄경전기’ 지엄전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첫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즉 613년 지엄이 12살이 되었을 때에 두순이 지엄의 집을 찾아와서 지엄의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저의 아들입니다. 저에게 돌려주십시오”라고 하자, 지엄의 양친은 지엄이 불도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기쁘게 그를 두순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것은 두순과 지엄의 사제관계가 특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두순은 지엄을 달(達)법사(通達?)에게 맡겨 가르치게 하였다. 지엄은 615년 14세에 승려가 되어 보광사(普光寺)의 법상(法常)·변(辨)법사(靈辨이나僧辯?)·임(琳)법사(靜琳?), 그리고 지상사의 지정에게 배웠다. 지엄은 처음에는 ‘섭대승론’을 공부하고 이어 ‘화엄경’을 연구했는데, 특히 화엄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지정으로부터 강의를 들은 뒤 지론종 남도파의 초조인 혜광의 ‘화엄경소’를 접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으며, 뒤에 한 이승으로부터 육상(六相)의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 628년 27세에 화엄학승으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지엄은 화엄종을 거느리는 조사의 입장에 섰으며, 659년 58세를 전후해서 종남산 지상사에서 장안의 운화사와 청정사로 옮겼지만,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의상이 지엄의 문하로 들어간 때는 661∼662년 즈음으로 지엄의 만년인 60∼61세 전후였다. 의상이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전수해온 사실은 의상에게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전하는 의상의 전기에 관한 주요 자료인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와 ‘송고승전’ 의상전 등의 역사서에서는 당 유학 중의 행적으로써 한결같이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만을 특필해주고 있다.

그런데 의상이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수학한 장소인 지상사가 소재하는 종남산에는 화엄종뿐만이 아니고, 지론종을 비롯하여 남산율종·삼계교·정토교 등의 여러 종파의 성지이기도 하였던 사실을 고려하면, 의상이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는 7∼8년 동안 화엄종 이외의 다른 종파의 불교도 섭렵할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의상의 불교사상에서 지론종과 함께 남산율종·삼계교·정토교 등의 영향이 나타나는 점을 주목하여 의상의 수학 과정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성이 제기된 바도 있으며, 심지어는 유학 이전 국내에서 공부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수학 과정에 대한 자료는 전무한 실정이기 때문에 우선 종남산 체류 중의 수학 과정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여 보기로 하겠다.

의상이 종남산에 체류하는 중에 교류한 인물로서 확인되는 사례로서는 화엄종의 지엄 이외에 남산율종의 도선(道宣,596∼667)이 유일한 인물이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에는 전해오는 말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가 있는 곳에 이르니, 이웃에 도선율사가 있어 늘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율사가 의상법사를 재에 초청하여 의상이 와서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래되었는데, 하늘의 공양은 때가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리때로 돌아가니, 천사가 그제야 왔다. 율사가 묻기를, ‘오늘은 어째서 늦었는가?’라고 물으니, 천사가 말하기를,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제야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고 그의 도력이 자기보다 나음에 탄복하여 그 공양물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가, 다음날 또 지엄과 의상 두 대사를 재에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의상법사가 도선율사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스님은 이미 천제(天帝)의 존숭을 받고 계시니,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40개 치아 가운데 한 어금니가 있다고 하니, 우리들을 위하여 청해서 인간에 내려다가 복을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율사가 뒤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상제께 전했더니, 상제는 7일을 기한으로 보내주었다. 의상이 예경하기를 마치고 대궐에 맞이하여 모셨다.” 이상의 인용문은 민간에 전승되던 설화인데, ‘고려사’에 의하면, 예종 15년(1120) 왕자지(王字之)가 송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어금니와 두개골을 대궐의 산호정으로 옮겼던 사실(‘삼국유사’에서는 예종 14년(1119) 정극영(鄭克永)과 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져온 것으로 다르게 기록되었다)이 있었는데, 이 사실에 덧붙여져 각색된 설화로 보인다. 그런데 그 설화의 내용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늘날 학계에서는 전연 주목받지 못하였다.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전해져온 어금니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고, 더욱이 의상과 관련되었다는 내용은 고려시대에 와서 새로 각색된 이야기로서 그대로 신빙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내용 가운데서 의상이 지상사에 체류하는 중에 도선과 교류하였다는 역사적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

주지하다시피 도선은 남산율종(四分律宗)의 개창자로서 624년 종남산에 들어가 백천사(白泉寺)를 짓고, 계율을 엄격히 지키며 선을 닦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남산율사라고 불렸다. 그는 한때 율의 이전(異傳)을 구하여 상부종의 법려(法礪)를 찾기도 하였으나, 곧 종남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현장의 역경장에 초청되어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율부와 전기에 관한 저술을 통하여 남산율종의 홍포에 진력하였다. 앞에 인용한 설화에서는 도선이 의상과 함께 지엄을 재에 초청하였다는 사실을 전하는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본다. 도선은 자신이 저술한 ‘속고승전’에서 두순전을 입전하여 두순이 교조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서 평가하고 있었고, 또한 지엄의 전기를 붙이어 지엄이 두순의 제자로서 그의 불교를 훌륭하게 계승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지엄은 도선의 6살 후배로서 667년 도선이 입적한 바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을 정도로 종남산에서 일생을 거의 같이하였다. 따라서 의상도 스승 지엄을 따라 도선과 교류하면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물론 도선의 계율은 앞서 643년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였을 때에 이미 신라에 전래된 바 있었고, 따라서 의상이 도선의 계율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당 유학 이전 본국에서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선의 계울을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종남산의 지상사에 체류하였을 때로 보는 것이 순리이다.

의상은 근엄 성실한 수행자로 일관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계율관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못하였다. 의상이 계율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는지는 ‘송고승전’ 의상전의 다음과 같은 서술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상은 말한 대로 행동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강의하고 교화하는 이외의 시간에는 수행하고 시방세계를 장엄하는 데 힘썼다. 덥고 춥고를 꺼리지 않고 항상 의정(義淨)의 세예법(洗穢法)을 행하여 수건을 사용하지 않고 서서 마르기를 기다려 그쳤다. 3법의(三法衣)와 병과 발우를 지니는 것 외에는 일찍이 어떤 다른 물건도 소유하지 않았다.”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계율의 엄격한 준수 사실을 잘 나타내주는 내용이다. 이 자료에서 묘사하는 시기는 의상이 귀국한 이후로 보이는데, 지상사 시절에 공부한 내용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송고승전’의 내용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것은 의정의 세예법인데, 의정(636∼713)은 어려서 출가하여 법현이나 현장의 인도 구법을 흠모하여 671년 37세로 광동에서 해로를 통하여 인도로 향하였다. 그는 20여년에 걸쳐서 30여개국을 방문하고 695년 많은 경론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등의 계율을 역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근본유부(根本有部)야말로 가장 순정한 율이라고 믿고 번역하여 사분율종의 계율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세예법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원조(元照)의 ‘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에 의하면, 비나야율에 의거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건을 사용하지 않고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고 하는 목욕법은 부파불교시대의 불교상황을 비교적 가깝게 전해주는 니까야 경전들에서 목욕법으로 설하고 있는 내용과 같다. 다음 3법의는 인도의 비구들이 입는 3종의 옷으로 왕궁이나 마을에 들어갈 때 입는 승가리(僧伽梨,大衣), 예불이나 강의 때 입는 울다라승(鬱多羅僧,七條衣), 일상생활이나 잘 때 입는 안타회(安陀會,五條衣) 등을 말한다. 그리고 3법의와 병·발우 이외에 다른 물건을 일체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파불교시대의 소승계율을 지키기에 노력하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의정은 671∼695년 사이에 인도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의상이 그를 직접 만났을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그러한 계율의 내용은 사분율을 위주로 하는 도선의 남산율종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의상은 지엄의 화엄종을 충실히 전해와서 신라에서 홍포하려고 적극적으로 활약함과 함께 교단운영과 일상생활에는 도선의 계율을 준수함으로써 청정한 비구로서의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74호 / 2023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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