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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 법답게 받아 지님)

기자명 진우 스님

사구게 깨달아 고락의 인과 벗어나면 복덕이요 더없는 공덕

금강경 한 구절 전하는 게 분별심 지닌 목숨 보시보다 복덕 커 
자업자득‧자작자수‧업인업과이니 세상 불공평 탓할 것도 없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업 소멸하는데 최선 다해야

세상은 연기에 의해 돌아가고, 사람의 고락은 탐진치 삼독심을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세상은 연기에 의해 돌아가고, 사람의 고락은 탐진치 삼독심을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항하사등신명보시 약부유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기복심다(其福甚多)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항하수 모래와 같이 많은 목숨을 보시하였더라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말해준다면, 목숨을 살려주는 복보다 더 큰 복이라 할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금강반야바라밀과 여래(如來)는 법신처(法身處) 즉, 법(法)의 몸이 있는 그곳을 이름한다. 그러나 법이 이미 공(空)했으므로 모두가 공했다 할 것이다. 그래서 법을 얻었다 함도 공하고, 얻은 자도 공하고, 얻은 것이 공하고, 마음이 머무는 그 곳이 공하고, 이러한 설명이 공하고, 이름이 공하고, 모습이 공하고, 깨달음이 공하다 함이다.

공(空)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하니, 세계는 세계가 아니요, 신상(身相)이 신상이 아니요, 금강반야바라밀이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어서, 돈연(頓然)히 공(空)하다 할 것이므로, 그래서 일체가 돈연(頓然)히 실(實)답다 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마음이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좋다 싫다는 고락 인과의 감정을 일으킬 아무런 이유가 없는 고로,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맑고 밝은 청정한 마음, 이를 돈연(頓然)히 실답다 하는 것이다.

진정한 돈연(頓然)의 실다움은, 돈연(頓然)이 공(空)하다는 것조차 두지 않음이요, 돈연이 공함은 돈연 또한 실다움을 두지 않는 것이니, 이렇게 양쪽의 변을 모두 여읜 자재(自在) 본연(本然)한 법신(法身)을 말 함이니, 한마디로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치가 이에 이르게 되면 말이 다하고 이치가 끊어졌다 함이니, 따라서 소납이 이렇게 설명하는 이 자체도 이미 틀렸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까지도 하지 않으면 이 조차 짐작을 하지 못할 것이므로, 가정하고 이름 하여 억지로 설(說)하는 것이니, 짐작을 잘해야 할 것이다.

노파심에서 하나 덧붙이자면, 털끝만한 것이라도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는 곧바로 이것이 생기면 반대의 저것이 나타나는 분별(分別)을 낳게 되므로, 좋고 싫은 고락(苦樂)과, 옳고 그른 시비(是非)가 동시에 생기게 되는 것이어서, 말과 생각을 하더라도 시비고락(是非苦樂)을 붙이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야말로 전 세계가 난리법석이다. 특히 일반 직장인들보다 자영업을 하는 국민들이 한마디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될 형편이다. 이러다가 모두가 파산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현실이 되고 있으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엄청난 스트레스는 나날이 쌓여져만 가고 있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니 끝도 있는 법, 절망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반증이니, 바닥이 다하면 반등의 시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이런 때야 말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을 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마음이 절실한 시점이라 하겠다.

이 엄중한 시점에 이런 말을 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겠지만, 소납은 걱정하는 마음은 간절하되, 마음이 불편하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선 인과(因果)의 법칙을 믿기 때문이다. 공업(共業)이든 자업(自業)이든 좋고 싫은 두 고락(苦樂)의 질량은 같다는 것이다. 받은 만큼 잃게 되고, 들어온 만큼 나가기 때문이며, 즐거운 만큼 괴롭고, 기쁜 만큼 슬프며, 행복한 만큼 불행하고, 희열을 느낀 만큼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따라 이것과 저것이 나타나는 시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인과(因果)를 받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이니, 그래서 항상 좋다 싫다 분별하지 않고, 이런 것과 저런 것으로 구별할 뿐이다. 따라서 늘 마음은 중도적(中道的)으로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또 어떡하지? 좋으면 좋은 대로 싫은 마음이 생기고, 싫으면 싫은 대로 더 좋은 마음을 찾게 되어 항상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하게 되므로,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열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간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가운데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소중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보시(布施)를 하되, 한두 번이 아니요, 다생(多生) 겁(劫)을 드나들며 항하(恒河)의 모래알과 같이 남을 위해 목숨을 보시했다면 과연 그 복이 얼마인가를 수보리에게 물으셨다. 그러나 이러한 목숨을 수도 없이 보시한 공덕이야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겠으나,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에 불과한 구절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남을 위해 설법(說法)한다면, 이 복덕이야 말로 수억의 목숨을 보시한 공덕보다 더 크다 하심이다. 과연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말씀일까? 당연히 의심이 들겠으나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일단은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선 남을 위해 목숨까지 보시(布施)하는 것은 웬만한 마음으로는 가능치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남을 위한다는 명분 이전에, 우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은 숭고한 마음이라고 칭찬할 대목이겠으나, 그 이전에,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 더 좋다고 판단되는 마음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좋다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동시에 좋지 않다는 상대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 분별심(分別心)이라 하고, 아주 미세한 분별심이라도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가 발생하므로, 이를 여의지 않는 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은 계속 이어져서 좋다 싫다는 분별 인과(因果)가 계속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어려운 보시라 하더라도,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으로 보시(布施)를 한다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계속 나타나게 되어 윤회(輪廻)로 이어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와 반대로, 좋다 싫다는 두 분별심(分別心)을 완벽하게 여읠 수 있는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깨달아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면, 이야말로 더 없는 성불(成佛)이요, 더 없는 복덕(福德)이요, 더 없는 공덕(功德)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니, 분별심으로 목숨을 보시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이 복덕이 크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해, 복덕(福德)을 비교하셨으니, 처음에는 한 개의 삼천대천세계의 칠보(七寶) 보시(布施)로 비교하셨고, 다음에는 항하(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의 칠보 보시로 비교하셨으며, 지금에는 항하사(恒河沙) 모래알의 수와 같은 신명(身命)보시(布施)를 비교하심이다. 그 다음에는 하루 3시(時)로 항하사(恒河沙)의 목숨보시를 말씀하신 것이니, 점점 어려움을 증가시켜서 비교하심이다. 이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이 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금강반야바라밀과 여래(如來)와 중도(中道)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설(方便說)이시니, 부처님의 눈물겨운 설법에 감복할 뿐이다.

가끔 사람의 됨됨이나 행동을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특히 과분한 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럴 깜이 아님에도, 그러한 복(福)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더구나 인품은 고사하고, 막돼먹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인색하기는 놀부보다 더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고, 성질은 개떡 같으며, 인물은 모과보다 더 보잘 것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실력도 뛰어나고, 인품과 인물도 빠지지 않고, 하물며 점잖기도 하고, 하지만 하는 일은 사사건건 잘되지 않고, 사기도 많이 당하고, 번번이 낙마하고, 그야말로 지질이도 복이 없는 참으로 아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된다. 아무리 살펴봐도 나보다 더 못난 사람들이 득세를 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공평치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물론, 억울한 생각에 속도 상하고 세상 살 맛 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세상은 무조건 공평하다. 팥 심은데 팥나고 콩 심은데 콩난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자작자수(自作自受)며, 업인업과(業因業果)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의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다만, 일시적으로는 불공평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에는 공평해진다. 알고 보면 세상은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 다만 내 마음이 비뚤면 세상이 비뚤게 보이게 된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불편할 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공성(空性)이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다. 그러니 잠깐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러므로 결과는 같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듯 보이는 사람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에 따라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고 돈이 많고 인물 좋고 떵떵거리는 듯 산다 하더라도, 그 속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고락(苦樂)이 좌우된다. 즉, 고락(苦樂)의 업(業)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의 과보(果報)도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니, 잘 사는듯하지만 고통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범하게 사는 듯하지만,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이 작을수록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러워하거나 억울해 하거나, 선망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인연 연기(緣起)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있는 그대로만 보고 받아들이면 된다. 스스로의 업(業)만 생각하고 멸해 나가면 된다.

적어도 부처님의 최고 설법인 ‘금강경’을 읽고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이들이라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세간(世間)의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꿈, 환, 물거품, 그림자)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슬, 번개) 같은 일들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하거나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75호 / 2023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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