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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조, 스승을 만나다

기자명 정운 스님

남악의 ‘마전작경’ 공안이 되다

마조의 스승은 남악회양 선사
‘기와를 갈아 거울 만든다’는
분별 떠나야 한다는 가르침
스승과 문답으로 깨달음 얻어

① 마조의 출가= 마조(709~788)는 고향 마을에 위치한 사천성(四川省) 시방현 나한사에 출가했다. ‘송고승전’ ‘마조장’에 의하면, 마조는 사천성 자주(資州) 당화상(唐和尙)에게 머리를 깎고, 유주의 원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여기서 당화상은 처적(處寂)을 말하는데, 신라인 무상대사가 법을 받은 스승과 동일한 인물이다. 마조는 구족계를 받은 후 사천성 익주 장송산·호북성 형주 명월산 등지에서 산거(山居) 수행하였다. 이렇게 수행하다가 호남성(湖南省) 남악산(南嶽山)으로 건너간다. ‘남악’은 중국에서 명명하는 오악산(五嶽山) 가운데 하나이다. 

② 마조의 스승, 회양은 누구인가?= 마조는 남악으로 가서 스승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을 만난다. 회양은 산동성(山東省) 사람으로 15세에 형주 옥천사의 홍경율사(634∼712)에게 출가했다. 율을 공부하다 동학인 탄연(坦然)과 함께 숭산의 혜안(慧安)을 찾아갔다. 혜안은 5조 홍인의 제자로서 혜능과는 동문이다. 회양은 혜안에게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如何是祖師西來意旨]’란 문답으로 대오한 뒤 혜안의 지시로 6조 혜능을 참문한다. 먼저 혜능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숭산 혜안선사 도량으로부터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다시 수행하고 증득해야 할 것이 있는가?”/ “수행하고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이 기연(機緣)으로 회양은 혜능에게서 법을 받고, 그를 여러 해 동안 모셨다.

③ 마전작경 기연= ‘전등록’에 의하면, 마조가 남악 전법원(傳法院)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회양이 그 곁으로 다가왔다. 회양은 그가 법기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대덕은 무얼하려고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요.” 그러자 회양은 암자 앞에 있는 돌 위에 기와를 갈아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십니까?”/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그렇다면 어찌 좌선만으로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스승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만일 나가지 않는다면 그대는 수레를 채찍질해야 하는가? 아니면 소를 채찍질해야 하는가?”

마조가 아무 말도 못하자, 회양이 다시 말했다.     

“자네가 지금 좌선(坐禪)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좌불(坐佛)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만일 좌선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선이란 결코 앉아 있는 것이 아니며, 혹시 그대가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머무르지 않는 법을 놓고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해서는 안 되네. 그대가 혹 좌불을 흉내 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행위와 다름없고, 보잘 것 없는 앉음새에 집착하면 정작 깊은 이치에 도달할 수가 없네.”

마조가 이 말을 듣고 활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승께 감사의 절을 올렸다. 이 이야기는 선종사에서 ‘마전작경(磨塼作鏡)’, 즉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는 유명한 공안이다. 이 마전작경이 이루어진 호남성 남악산(南嶽山)은 도교의 명산이다. 그런데도 마전작경 기연을 상징하기 위해 남악산 중심에 ‘마경대(磨鏡台)’라고 새겨진 큰 바위를 중심으로 사방에 200평 정도 되는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또 바위에는 ‘선원(禪源, 선의 원류)’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었고, 마조가 좌선한 전법원 자리에 마조암(馬祖庵)이라고 편액이 쓰인 당우가 있다. 아마도 중국의 당 정부와 불교협회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마조의 중국불교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다. 

각설하고, 마전작경에 대해 사유해보자. 굳이 좌선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워있든 서 있든 앉아 있든 어떤 형태로든 선이 가능하다. 또한 앉아 있는 부처 흉내를 낸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외부적인 형체에 관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형체를 이끌어가는 투철한 마음가짐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 어떤 것에도 분별하지 않는 무분별심, 형태나 관념이 아닌 무주상(無住相)·무심(無心) 사상이다.

정운 스님 동국대 강사 saribull@hanmail.net

[1675호 / 2023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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