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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원 학생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불법 전한 23년 포교인생

  • 무진등
  • 입력 2023.04.03 15:11
  • 호수 1675
  • 댓글 2

김경태 광주전남 포교사단  북부총괄2팀 교정교화 팀장

친구따라 광주 향림사 찾았다 어린이청소년 법회 지도법사 맡아
불교대학 졸업 후 광주불교 포교사 연합회 창립…사표내고 활동 전념
2000년 소년원 법회 시작해 교정포교 매진…포교원장상 수상도

“포교사 단복을 입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말하는 김경태 포교사. 23년간 포교최일선에서 교정포교를 위해 헌신한 그는 여전히 포교현장으로 나가는 일이 즐겁기만 하다. 매주 갈색 단복을 갖춰입고 소년원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한 남자가 들판을 지나가는데 성난 코끼리가 갑자기 달려들어. 무서우니까 도망을 쳤지. 우물이 보이고 칡넝쿨이 있네. 잡고 내려갔어. 숨 돌리려는 찰나 아래를 보니 독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자신을 보고 있어. 설상가상 검은 쥐와 흰 쥐가 나타나 넝쿨을 갉아먹고 있네. 어째쓰까. 그 순간 위에서 꿀이 떨어졌네. 달달헌게 입에 닿으니까 지 처지를 잊었으야.”

김경태 포교사(정안)의 구수하고 친근한 사투리에 실감나는 연기가 더해지자 고룡정보산업고등학교(전 광주소년원) 불교반 학생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일요일 오전인 탓에 학생들의 눈에 졸음이 서려있지만 마치 ‘1타 강사’를 연상케하는 그의 열띤 강의에 잠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진지 오래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질 때 쯤 그는 “다음 시간에~”라며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리곤 준비해온 간식을 꺼내 학생들과 나눠 먹으며 자연스레 대화를 나눈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모두가 아쉬운 표정으로 다음을 기약한다. 일주일에 한번, 짧지만 학생들과 깊은 교감을 나눈 그는 천천히 문밖을 나선다.

“23년간 소년원 교정포교활동에 집중해왔어요.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필요한 곳이 어디일까 했는데 바로 소년원이더라고요. 학생들 인생 길라잡이가 돼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못하는 연기까지 하면서 불교설화를 들려주죠.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요. 내가 알려주는 것보다 본인이 스스로 찾아야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처럼 고등학교 3학년, 친구였던 범각 스님을 따라 광주 향림사에 발을 들인 것이 불교와의 본격적인 만남이었다. 학력고사 준비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시기였던 지라 머리도 식힐 겸 스님의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어머니를 따라 집 뒤에 있는 작은 암자에 몇 번 찾아가긴 했어도 그뿐이었다. 10여년 만에 사찰을 찾은 그였지만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했고, 편안했다.

“기억도 선명하지 않은 유년 시절 이후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가질 않았어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실이 있긴 한가봐요. 만날 인연은 어떻게서라도 만나게 돼 있는 게. 참 오랜 시간 돌고 돌아 부처님 손을 잡게 됐네요.”

놀거리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절에서 친구들과 함께있는 시간은 즐겁기 그지 없었다. 스님에게 듣는 불교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스님이 내준 간식은 허기진 배를 달래기에는 그만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친구들과 마루에 앉아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법회 지도법사였던 한 스님이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어린이청소년법회를 맡아보는 것은 어떠니?”라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스님의 제안에 당황했지만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하겠습니다”고 대답했다.

막상 아이들을 지도해야 하는 입장에 서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린이 법회 출신도 아니었고, 가르쳐주는 이 하나 없었다. 그러나 50명이나 되는 많은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우선  불교 교리와 부처님 생애 책을 펴들었다. 기본을 알아야 입이라도 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스님에게 물어 사찰 예절도 배웠다. 일반법회에 들어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지 익혔고, 스님을 따라 교소도 법회에 들어가기도 했다. 여러 곳에서 눈치코치로 배운 방법을 어린이 법회에 적용시켰다.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도 아이들 앞에 딱 서니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 아이들은 저만 바라보고 있고. 만약 다음시간부터 나오지 않으면 제 책임이 돼버리니까 이를 악물었죠. 그때부터였을 거에요. 청소년 포교에 사명감이 생겼던게.”

스님이 아닌 재가자가 법사로 나서니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형처럼, 오빠처럼 친근하게 다가가고 구연동화를 하듯 이야기를 들려주니 아이들은 금세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학력고사 준비를 병행하면서 법회를 이끌었다. 대학 진학 후에도 이어졌고 향림사 청년회장까지 도맡아 청년불자들의 결집에도 기여했다.

대학 진학 후 그의 활동반경은 확대됐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전남지부 총무부장을 맡아 대학생 불자 양성과 회원들의 신심 증장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동아리 실은 물론 불갑사 등 곳곳 사찰을 다니며 절 수행, 독경 수행을 하며 정진했다.

청소년 법회 지도법사, 청년회장, 대불련 총무부장까지 역임했지만 부족함을 계속 느꼈다. 독학으로 공부했기에 전문적인 교육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1990년이 되면서 곳곳에 불교대학이 생겼고, 그는 신협에 근무하면서도 없는 시간을 쪼개 광주불교대학에 입학했다. 과도한 업무에 몸은 힘들었지만 학교로 향할 때만큼은 초인적인 힘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혼자가 아닌 도반들과 함께여서 수업 시간이 즐거웠고, 2년이라는 긴 레이스에 낙오자 없이 완주에 성공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은 마음의 허기가 그를 뒤따랐다. 불교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배움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도반들에게 전법 활동에 나서야 함을 강조했고, 불교 대중화를 위해 광주불교 포교사 연합회를 창립, 지역 곳곳에 부처님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당시는 포교사 고시제도도 없었고, 포교사단도 없었던터라 지금과 같이 계층별 팀이 꾸려지지 않았다. 각개 전투방식이었고, 맨땅에 헤딩이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을 전해 광주 불교를 활성화 시키겠다는 그의 다짐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공무원 불자들만의 모임이 없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신행 활동을 하지 않으면 ‘나이롱 불자’가 되거나 개종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공무원 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불자연합회 창립을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광주지방경찰청, 서구청, 광주도청, 광주국세청 청사 내부에 법당을 조성하고 연합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 지역 사찰 스님들을 초청해 법회를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조력자 역할을 맡아 공무원 불자연합회가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했다.

김 포교사는 법보신문 광주지사장으로 근무하며 호남 불교계 소식을 알리는 데도 열정적이었다. 글을 쓰는 것도, 사진을 찍는 것도 어려웠지만 원하던 일을 하고 있고 모든 일이 호남 불교 중흥을 위한 포교 일환이라 생각했다.

“졸업 후 불교계 기자로 일하고 싶었어요. 현실은 녹록지 않더라고요. 그러던 차 법보신문에서 좋은 기회를 줘 10년간 근무할 수 있었죠. 호남지역 사찰 곳곳을 다니며 사진 찍고, 취재하고 또 포교사들의 활동 소식도 전할 수 있었기에 눈 코 뜰새없이 바빠도 행복했습니다.”

2000년 포교사단이 창립되면서 그의 활동도 체계적으로 변했다. 광주전남 지역단 청소년 팀장을 맡아 매주 어린이 법회에 나갔고, 군포교와 교정교화 포교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소년원이었다. 어린이 청소년법회 지도법사 경험도 있었기에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했다. “소년원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그닥 좋지 않았다. 소년원에 대한 편견이 두꺼웠고, 처분을 받은 애들이 그 안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범죄를 저질러 이 안에 들어왔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며 “안에 있는 아이들도 청소년이고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참회하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곤 매주 일요일 도반들과 함께 소년원을 찾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불교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에게 불교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소년원이라는 특성상 다른 법회와는 차별을 둬야 했다. 어떻게하면 학생들에게 불교를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활동을 할 수 있을거라 판단, 불교 입문 교리를 아주 쉽게 풀어 정리해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가르쳤다. 사경, 찬불가, 108배 등 불교문화 체험 기회도 제공했다. 반응이 가장 좋았던 건 불교설화였다. 학생들이 들으면 좋을 만한 설화들을 정리하고 재구성해 들려줬다. 족집게 강사 같은 그의 언변에 아이들은 2년 내내 불교반 자리를 지켰다. 2년마다 새로운 아이들이 수감되지만 언제나 같은 표정, 태도로 반겼다.

코로나19로 교정기관 출입이 제한되자 그도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면 활동은 어려워졌지만 소년원 학생들을 위한 간식은 빼놓지 않았다. 그러다 2022년 10월 부분적으로 출입이 가능해지면서 김 포교사는 교정포교활동을 재개했다.

“재정적으로는 힘들긴 해도 20년 넘게 학생들을 봐왔는데 제가 책임져야죠. ‘사회에 나가면 찾아뵐게요’라는 학생들의 말 한마디가 저를 계속 이곳으로 이끌어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아니었구나’ 싶죠.”

직장인 특성상 자유로운 포교활동은 불가능했다. 당시 선운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포교사님의 도움이 필요해요”라는 부탁을 애써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는 큰 결단을 내렸다. 사표를 냈다. 그리곤 2012년 고청군청 문화재 안전경비로 근무를 시작했다. 사찰에서 근무 하면서도 일정조절이 가능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었다. 주중에도 사찰, 단체와 함께 캠페인에 나선다거나, 각종 법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 선운사 문화재보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그이기에 사찰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사찰을 안내하거나 차를 내주는 등의 봉사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이탈 포교사 복귀에도 앞장섰다. 포교사 연령대가 높다보니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을 중단하는 이들이 계속 늘어났다. 함께했던 도반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때마다 연락을 돌리고 때론 가정을 방문해 포교사 활동을 이어가자고 독려했다. 그렇게 현장을 떠났던 포교사들이 하나 둘 다시 지역단으로 돌아와 전법 포교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교정교화전법단장 표창, 포교원장 표창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포교사의 날 포교원장상을 수상했다.
포교사의 날 포교원장상을 수상했다.

친구의 제안으로 발을 들인 사찰은 김 포교사를 부처님 품으로 이끌었고,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어린이 법회 지도법사는 그를 포교사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리고 40년이 넘도록 지역불교, 포교사단 발전을 위해 묵묵히 포교활동에 임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는 그는 이제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간다.

“갈색단복이 참 잘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단복을 입는 순간 마음가짐이 새로 무장되는 느낌이랄까요. 내 손으로 단복을 입지 못하는 날까지 포교사 활동을 할겁니다. 한국불교 발전을 위해, 이 세상이 불국토가 되는 그날을 위해.”

김민아 기자 kkkma@beopbo.com

[1675호 / 2023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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