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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고대불교-삼국통일과 불교(51)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7)

의상은 스승 지엄 통해 삼계교 영향…화엄일승 사상에도 수용

의상 머물던 지상사는 삼계교의 백탑사와 같은 골짜기에 위치
지상사 지정에게 화엄학 수학한 지엄은 삼계교 영향 깊이 받아
평등과 부 재분배 촉진했던 삼계교, 지배세력의 탄압으로 절멸 

백탑사는 신행의 사리탑을 조성한 이후 삼계교도들의 탑원이자 성소였으며 삼계교도들의 중심 거점이 되었다. [법보신문DB]
백탑사는 신행의 사리탑을 조성한 이후 삼계교도들의 탑원이자 성소였으며 삼계교도들의 중심 거점이 되었다. [법보신문DB]

최근까지 의상이 당에 유학하여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만을 수학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의상에 관한 중요 사료인 ‘삼국유사’ 의상전교조나 ‘송고승전’ 의상전 등에서 한결같이 지엄으로부터 화엄교학을 전수한 사실만을 전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의상의 불교는 화엄학 외에 지론종과 계율종, 삼계교나 정토교 등의 영향도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 유학 이전에 신라에서 이러한 불교들을 섭렵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으나. 나로서는 역시 당 유학 중인 661년부터 670년까지 10년 동안에 의상은 지엄 이외에 다른 불교 종파의 인물들과도 교류하였을 가능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스승인 지엄이 지론종·계율종·삼계교·정토교 등 여러 종파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의상의 다양한 불교 교류활동도 지엄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지엄의 중심 사찰이고, 의상이 주로 머물렀던 지상사가 소재한 종남산에는 수·당 시대에 불교의 성지로서 여러 종파의 고승들이 수행하고 있었는데, 특히 화엄종의 두순-지엄 이외에도 지론종의 정연-지정, 남산율종의 도선, 정토교의 대성자인 선도 등과 함께 삼계교의 성적(聖蹟)도 널리 알려졌다. 지난 호에서 의상이 남산율종의 도선과 교류하였던 사실을 추적하여 보았는데, 이번 호에서는 신행의 삼계교와의 관계를 검토하여 보겠다.

중국 불교계는 574년 북주 무제의 폐불사건을 계기로 말법사상이 강렬하게 대두되었고, 이러한 자각에 입각하여 새로운 종교들이 탄생하였다. 하나는 상주(相州, 하남성 안양현)에서 일어난 신행(信行)의 삼계교였고, 다른 하나는 병주(幷州, 산서성 태원부)에서 일어난 도작(道綽)의 정토교였다. 전자는 말법의 악세(惡世)가 되었으므로 오직 보경보법(普敬普法)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 대하여 후자는 말법의 악세가 되었으므로 미타일념(彌陀一念)을 전념 전수하자고 설파함으로써 전혀 다른 사상과 실천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 두 종파는 장안에 진출하여 수와 당의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화엄종의 의상도 지상사의 지엄을 통하여 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의 일승보법(一乘普法) 사상과 아미타정토신앙은 그 결과로 이해된다.

삼계교 개조인 신행(540~594)은 17세 이래 스승을 구하여 ‘화엄경’ 등의 여러 경전을 공부하고, 시대에 맞는 진실한 구원의 가르침을 추구하여 마침내 법장사(法藏寺)에서 삼계교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북주의 무제에 의해 폐불이 단행되었기 때문에 구족계를 버리고 노동에도 종사하며, 한 벌의 옷만 걸치고 하루 한끼만을 먹으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돕고 예배하였다. 뒤에 광엄사(光嚴寺)로 옮겼는데, 수 문제의 불교부흥정책이 시행되면서 589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와 (좌)복야 고영(高穎)에게 초대되어 진적사(眞寂寺)를 설치하고 머물렀다. 여기에서 신행은 신도들과 함께 교지를 선포함과 동시에 ‘대근기행법(對根起行法)’ ‘삼계불법(三階佛法)’ ‘중사제법(衆事諸法)’ 등 40여권을 지었다. 또한 별도로 경사에 화도(化度)·광명(光明)·자문(慈門)·혜일(慧日)·홍선(弘善) 등 5개 사찰에 삼계원을 설치하였다. 594년 신행이 화도사에서 입적하자, 유해를 종남산 치명(鵄鳴)의 언덕으로 옮겨 화장하고 탑과 비를 세웠다. 그 뒤 신행의 제자인 본제(本濟,562~615)·승옹(僧邕,543~631) 등의 삼계교도들도 종남산 신행의 묘탑 부근에 안장됨으로써 삼계교의 성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신행탑원에 인접한 사찰이 바로 지론종의 정연(淵,544~611)이 창건한 지상사(至相寺)였다. 정확하게는 신행탑원은 종남산 편재곡(楩梓峪)의 골짜기 입구인 치명의 언덕에 위치하고, 지상사는 같은 편재곡의 골짜기 안쪽의 산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두 사찰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행탑원은 767년 백탑사(百塔寺)로 개명되기 이전에는 ‘종남산신행탑’ ‘종남산지상사북암신행묘소’ ‘종남산지상사편재곡신행선사탑원’ ‘치명부선사림’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두 사찰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준다. 그런데 백탑사는 신행의 사리탑을 조성한 이후 대대로 삼계교도들의 탑원이자 성소이었기 때문에 당대 초기에 장안 일대에서 활약하던 삼계교도들의 중심 거점이 되었던 반면 지상사는 정연-법림·지정-지엄으로 이어지는 지론종 남도파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두순-지엄-의상·법장으로 이어지는 화엄종의 초기 성립기의 근본도량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삼계교와 지론종, 초기 화엄종과의 사이에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 이상의 사상적으로도 상호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지상사를 중심으로 지엄에 이르는 지론종 남도파의 계보에 속하는 인물들과 삼계교와의 관계는 신행탑원이 설립되기 이전인 신행이 생존한 당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론종 남도파의 학계는 혜광(慧光)-도빙(道憑)-영유(靈裕)-정연(淵)-지정(智正)-지엄(智儼)-의상(義相)·법장(法藏)으로 상승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영유의 단계에서 이미 삼계교의 개창자인 신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추정이 1927년 도키와 다이조(常盤大定)에 의해 제기되었다. 즉 삼계교의 핵심 사상의 하나인 보불보경(普佛普敬)은 신행에 앞서 지론종의 영유가 강조하고 실천함으로써 신행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영유(518~605)는 신행보다 22년 연상으로 같은 상주(相州)에서 태어나 활동하였고, 589년 신행이 장안으로 진출한 데 이어 다음 해에 국통의 지위를 제의받았는데, 그들을 초청하거나 천거한 중심인물도 (좌)복야 고영(高潁)이었다. ‘속고승전’의 영유전과 신행전에 의하면, 두 사람은 종교적 실천과 보시의 방법에서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신행의 삼계교는 지론종의 영유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신행과 영유의 장안 행보 이후 그들의 제자들도 장안으로 진출하였는데, 특히 종남산의 같은 지역에서 신행의 제자들은 백탑사, 영유의 제자들은 지상사를 창건하여 각기 조정사원(祖庭寺院)으로 삼았다. 백탑사의 창건 경위는 앞에서 약술하였거니와 지상사를 창건한 것은 영유의 제자인 정연(544~611)이었다. 정연은 상주에서 영유에게 수학하고, 종남산에 지상사를 창건하여 지론종 남도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는데, 삼계교도로도 추정될 정도로 특히 삼계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론종이 삼계교와 맺은 인연은 영유-정연의 2대에 그치지 않고 다음 지정과 법림(法琳)의 3대로 이어졌다. 특히 지정(559~639)은 화엄종의 기초를 마련한 지엄(602~668)의 스승이며, 법림(562∼639)은 당나라 초기의 도교우위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다가 투옥되고, 익주(益州)의 절로 쫓겨나 세상을 떠났다. 법림은 611년 스승 정연의 사리탑을 지상사에 수립하였는데, 그에 앞서 594년 ‘신행선사전법비(信行禪師傳法碑)’를 세운 인물로도 추정된다.

이로써 영유부터 지정으로 이어지는 지상사 계통의 지론종 남도파는 삼계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지정에게 화엄학을 수학한 지엄은 삼계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에 삼계교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다른 종파의 승려들과 달리 정확하게 인식하고 높이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론종의 지상사에 지엄의 교육을 맡긴 화엄종의 초조 두순(杜順,557~640)도 삼계교와 무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두순은 ‘화엄경’ 독송과 보현행을 닦은 선정가이면서 신통을 나타낸 인물이었는데, 그의 사리탑이 수립된 번천(樊川) 북원의 화엄사는 장안과 종남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같은 불교권에 속하였음은 물론이다.

삼계교는 말법의 악세(惡世)라는 역사의식에서 출발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주체자와 부처의 가르침 자체를 각각 3단계로 구분하고, 보경(普敬)·인악(認惡)·공관(空觀)을 기둥으로 하는 3계의 보불법(普佛法)을 실천하는 것만이 말세의 사람들을 악에서 벗어나게 하고 성불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보불법 가운데 특히 보경(普敬)은 ‘두루 공경한다’는 의미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다른 모든 중생을 위해 진력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서 현실에서는 무진장원(無盡藏院)의 운영을 통하여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복지적인 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신분의 평등화와 부의 재분배를 촉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지배세력에게는 위험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행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삼계교에 대한 탄압이 행해졌다. 먼저 600년 불교부흥정책을 추진하던 수 문제에 의해서 삼계교의 유행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다지 엄한 조치는 아니었다. 당대에 들어와 무진장원을 중심으로 한 교단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660년대는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남산율종의 대성자이자 ‘속고승전’ 저자인 도선은 “신행은 일승보살로서 부처님이 충분히 설하지 않았던 제3계 불법을 널리 설했다”고 극찬했으며, 화엄종의 제2조로 추앙되는 지엄도 신행의 교설, 특히 그 중심사상인 ‘보경’과 ‘인악’을 높이 평가하여 “그것은 일천제(一闡提)를 구제하여 일승으로 회향시키고, 동시에 삼승으로 수순하기 위함이다. 도리에 마땅함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붙여서 기록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집권하면서 삼계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695년 삼계교의 전적 22부 29권을 ‘위경(僞經)’으로 판정하여 불전 목록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699년의 칙령으로 삼계교를 배우는 사람에게 걸식·지계·좌선 등의 실천만이 인정되었다. 705년 측천무후가 제위에서 물러나고 일시 부흥하는 듯 하였으나, 현종이 즉위하면서 721년과 725년 연이어 금지령을 내렸고, 삼계교는 쇠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상이 지상사에 머물면서 지엄에게 화엄학을 수학하는 시기인 661년부터 10년간은 삼계교가 한창 번성한 시기였다. 의상은 삼계교를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던 지엄을 통하여 삼계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확실시되며, 인근에 소재한 백탑사의 삼계교도들과의 직접적인 교류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종에서 삼계교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사례로서는 지엄과 의상이 삼계교의 핵심 개념인 보법(普法)을 받아들여 화엄일승의 사상적 핵심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성기(性起)와 함께 사용하였다. 보법이라는 용어는 원래 삼계교를 개창한 신행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삼계교를 달리 보법종(普法宗)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는데, 삼계교의 교판론에서 최상승의 교설을 보귀보법(普歸普法)이라고 하였던 것에 기인한다. 그런데 삼계교에서 말하는 제3계 보법은 여래장불·불성불·당래불·불상불 등의 보불(普佛)을 설하는 ‘능가경’ ‘승만경’ ‘열반경’ ‘법화경’ ‘화엄경’ ‘십륜경’ 등에 포함된 가르침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에 견주어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의 별교일승의 가르침만을 그 범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훗날 의상으로부터 지엄의 화엄학을 전해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원효는 일승만교로 판석된 교설, 곧 ‘화엄경’과 보현교의 핵심 개념으로 보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점에서 또 다른 특색을 가졌다. 그러나 신행의 삼계교와 지엄·의상의 화엄종 사이의 차이점에서 더욱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진 것은 불교의 실천과 교화의 방법상의 문제인데, 다음에 언급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76호 / 2023년 4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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