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0. 수행이론의 총망라(49)-증입 관련; 각론⑪

바른 지식 얻으려 무심‧무공용 강조

티 없이 이타적 삶을 살아가라
부동지에 무공용 보살행 권해
기존 명상수행 관련 이야기들
제8부동지에 수집해서 설명도

‘화엄경’ 구성작가는 경의 곳곳에서 이타적 보살행을 강조해왔는데, 이곳 ‘제8 부동지’에는 특히 ‘공용 없는[無功用]’ 보살행을 권한다. 불교에서 무심(無心) 또는 무공용(無功用)이니 하는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금강경’도 그렇다. 수보리를 등장시켜 부처님과 문답 형식으로 구성작가는 이야기를 이렇게 꾸며간다. 

대승을 주장하는 불교도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또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잘못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대답하시기를, 보시 등 여섯 가지 바라밀 수행을 하되 ①모든 중생에게 ②최상의 깨달음을 얻도록 ③변함없이 ④‘나노라 하는 티 있는 마음’ 등을 내지 말고 하라. 경학자들은 ①을 광대심(廣大心), ②를 제일심(第一心), ③을 상심(常心), ④를 부전도심(不顚倒心)이라 명명한다. 

이 중에서 ④의 ‘부전도심’이 필자가 이 글 처음에서 말한 ‘무공용’과 그 의미를 같이한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대답하자. 질문; 왜 이렇게 ‘무심’이나 ‘무공용’을 강조할까? 대답; 바른 지식을 얻기 위함이다. 바른 지식에 따라 행동해야 바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좀 더 설명하기로 한다. 

감각기관[根], 감각에 주어지는 대상[境], 의식의 활동성[識], 이렇게 근‧경‧식 3사(事)가 화합할 때 비로소 지식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는, 불경의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마치 멀쩡한 귀를 가진 사람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마음을 기울이면, 음과 가사 내용을 인식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중에서 여섯 번째의 ‘의(意)’라는 기관은 ‘법(法)’을 대상으로 하는데, 거기에 ‘식(識)’이 작동하면, 지식이 만들어진단다. ‘의’라는 감각기관이라니? ‘눈’과 ‘귀’와 ‘코’와 ‘혀’와 ‘피부’ 등의 감각기관은 알겠는데, ‘의’라는 감각기관은 어디에 있나? ‘의’라는 감각기관은 실은 저마다의 기억 덩어리로, 한 찰나 이전에 작동하던 ‘식’이 만들어 누적해둔 지식 알갱이 덩어리이다. 한 찰나 이전의 ‘식’을 ‘의’라고 하여, 찰나라는 극히 짧은 시간의 선후를 두지만, 이 둘은 ‘등무간(等無間)’이다. 

우리는 ‘누적된 지식 덩어리’를 가지고 그것을 감각기관 삼아 ‘자신의 감각기관에 주어지는 소재’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참인 지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식 만들기에 관계되는 도구 즉, ‘누적된 지식 덩어리’를 잘 다듬어야 한다. ‘누적된 지식 덩어리’ 속에 오염되거나 일그러진 종자(種子, bĭja)가 있으면 깨끗하게 하고 펴야 한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예 ‘누적된 지식 덩어리’의 활동성 자체를 정지시켜, ‘자신의 감각기관에 주어지는 소재’가 있는 그대로 나에게 알려지도록 해야 한다. 

내가 대상에게 말을 걸기보다는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도록 해야 한다. 아니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는 ‘논어’ 공자님의 말씀처럼, 마음대로 하더라도 세상 법도를 넘지 않도록 ‘누적된 지식 덩어리’인 몸과 마음[身心]을 정화해도 좋다. 망령된 마음을 없애라는 뜻인 ‘무망심(無妄心)’을 줄인 뜻으로서의 ‘무심(無心)’ 말이다.

이런 ‘무공용’ ‘무상의 정사유’ ‘무심’ 등의 자세로 보살행을 실천하라고 금강장보살은 설법을 계속하고 있다. 이하에 인용된 운허 스님의 ‘한글대장경’ 번역에서 보이듯, 대승 경전 작가는 집요하게 요구한다. 티 없는 마음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아내 보자고.

“또 선남자여, 그대는 비록 이 고요한 해탈을 얻었지마는, 범부들은 능히 증득하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번뇌가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깨닫고 관찰함이 항상 침노하나니, 그대는 이런 중생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라. 또 선남자여, 그대는 본래에 세운 서원을 기억하고 일체중생을 모두 이익케 하여 부사의한 지혜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화엄경’ 구성작가는 기존의 명상 수행 관련 다양한 이야기를 이곳 ‘제8 부동지’ 부분에 수집해두기는 한다. 무자성(無自性)의 공이 어떠니,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멸했느니, 멸진정(滅盡定)이 어떠니, 욕계의 번뇌가 작동하지 않느니. 그러나 결국은 꿈 깨고, 티 없이 보살행 하란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76호 / 2023년 4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