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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서 빈척됐다 재심으로 복귀…팔공총림 방장에 추대

중국불교협회와 교류…한중 수교 견인
종단분규 과정서도 행자교육원 시행
불교방송국 지방국·불교TV설립 추진
3선 논란으로 퇴진…비닐움막서 수행
2021년 지도력 상징 대종사 법계 품서

 

의현 스님은 1990년 6월22일 조계종 중앙종회 100차 임시회에서 제26대 총무원장으로 당선됐다.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후 의현 스님이 26대 총무원장에 당선되기 전까지 총무원장 평균임기는 1년2개월에 불과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6개월이 멀다하고 총무원장이 바뀌는 혼란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4년 임기에 이어 재임까지 이룬 것은 조계종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의현 스님은 이날 “불교방송 지방국 확대, 불교회관 건립 등 교세 확장과 중흥을 위한 사업추진을 약속”하며 새로운 임기 4년의 첫발을 내디뎠다. 

첫 성과는 중국불교협회와의 교류였다. ‘경향신문(1990년 9월1일자)’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그해 8월19~24일 중국불교협회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 무렵 한국과 중국은 미수교 상태였다. 의현 스님은 조박초 중국불교협회장과 만나 신도 교류뿐 아니라 역사유적지탐사, 학술연구 등을 제안했고, 중국 측은 ‘한중불교우의촉진회’를 설립해 한국과 중국 간의 국가수교를 위해 양국불교계가 상호협력할 것을 제의했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한중불교교류는 1992년 8월 한중수교로 이어졌다. 

이런 성과와 달리 종단 내부적으로는 큰 혼란에 직면했다. 1991년 1월 종정 성철 스님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후임 종정선출 문제로 내홍이 불거졌다. 종정후보로는 성철 스님과 원로회의 의장 월산 스님이 거론됐다. 두 스님 모두 “종정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며 고사했지만, 각 문중에선 한 치 양보도 없었다. 성철 스님은 용성‧동산 스님으로 이어지는 범어문중이었고, 월산 스님은 경허‧만공‧보월‧금오 스님으로 이어진 덕숭문중 대표격이었다. 그렇기에 종정추대는 조계종의 양대 축을 형성해온 범어‧덕숭문중 간의 자존심 대결로 확대됐다. 1990년 11월부터 시작된 종정추대 논의는 해를 넘겨서도 해결국면을 찾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6월3일 서암 스님이 원로의장에 추대되면서 종정추대 문제는 새 국면을 맞았다. 서암 스님은 6월16일 종정추대 수습대책위원회를 열어 “종정추대는 원로회의에서 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20개 교구본사주지들도 6월17일 총무원에서 회의를 열어 ‘교구본사주지연합회’를 발족하고 원로회의에 힘을 실었다. 이에 반발해 불국사, 법주사, 용주사, 신흥사의 교구본사주지와 중앙종회의원 등 20여명은 6월17일 ‘불교중흥회’를 발족했다. 이들은 “종정추대는 종헌종법대로 해야 한다”고 결의했으며, 종단개혁을 위해 총무원장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원로회의와 총무원 집행부는 그해 7월8일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원로회의에서의 종정추대’를 결의했다. 이어 7월29~30일 불교중흥회 측 스님들이 이탈한 가운데 열린 중앙종회에서 “종정은 원로회의에서 추대한다”고 확정했다. 이에 따라 원로회의는 8월22일 성철 스님을 제7대 종정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불교중흥회 측은 9월16일 통도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10월7일 서울 논현동 우주빌딩에 새 총무원 간판도 내걸었다. 종정추대 문제로 시작된 갈등은 결국 ‘강남·북 총무원’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의현 스님은 종단분규 과정에서도 출가한 스님들의 기본교육을 위해 1991년 3월 처음으로 행자교육원을 설치한 데 이어 이듬해에도 2기 행자교육원을 운영했다. 1991년 12월26일에는 공보처에 불교방송국 지방국 설립과 민영TV방송 설립을 위한 신청서를 제출하는 등 재임과정에서 약속한 공약을 이행해 나갔다.(법보신문, 1992년 1월13일자) 

그러나 의현 스님은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면서 다시 논란에 휘말렸다. 이 과정에서 ‘불교방송국 지방국 인가’ ‘중앙승가대 정규대학승격’ 등이 김 후보의 공약으로 채택됐다. 그렇더라도 87년에 이어 92년 대선까지 선거 때마다 종단 대표자가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불교계의 정권예속화에 대한 우려를 키울 수 있었다. 의현 스님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커지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그해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잇따른 개혁조치를 시행하면서 과거 군사정권과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이는 사회민주화에 앞장섰던 진보성향 스님들이 종단 내부문제에 깊이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됐다. 1992년 출범한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1993년 3월 중앙종회의원 직선, 겸직금지 등을 담은 종헌종법 개정안을 중앙종회에 청원하면서 종단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전국의 스님들을 대상으로 ‘종단 개혁’을 위한 서명운동에 착수했고, 진보성향의 출재가단체가 중심이 된 ‘전국불교운동연합’이 창립되면서 종단 안팎에서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진보성향 단체가 중심이 된 종단개혁 요구는 1994년 들어 본격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상무대 비리의혹 사건’이 불거지면서 종단 혼란이 가중됐다. 이 사건은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인 조기현 청우건설회장이 상무대 이전 공사를 하면서 공사대금을 유용해 이 중 80억원을 동화사 통일대불 불사비로 시주했는데, 이 돈이 불사에 쓰이지 않고 여당의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었다. 훗날 이 사건은 의현 스님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의현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선우도량 등 8개 단체는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를 구성하고 의현 스님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맞서 의현 스님은 “불교케이블 TV 등 종단중흥불사를 마무리 짓고 물러나겠다”(10대 중앙종회회의록)며 3선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3월30일 총무원과 범종추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언론은 종단개혁을 추진하는 범종추를 ‘민주’ ‘청렴’의 집단으로, 3선을 추진한 의현 스님 측을 ‘반민주’ ‘부패한 집단’ 등으로 규정짓기 시작했다. 언론의 이 같은 프레임은 의현 스님의 운신 폭을 좁게 만들었다. 결국 의현 스님은 4·10승려대회 이후 총무원 접수에 나선 범종추 등에 의해 4월13일 새벽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승려대회 이후 출범한 개혁회의는 종단혼란의 책임을 물어 1994년 6월8일 의현 스님에 대해 종단 최고징계인 ‘멸빈’을 결정했다. 그러나 개혁회의가 내세운 징계사유는 대부분 확인되지 않은 의혹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개혁회의는 의현 스님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징계를 결정했다. 

총무원장에서 불명예 퇴진한 의현 스님은 이후 2년간 충북 옥천 산기슭 비닐움막에서 기거했다. 종단에서 빈척된 상태여서 어느 절에도 갈 수 없었고, 오랜 도반의 입적소식을 듣고 영결식장을 찾았다가 사미승들에게 끌려나오는 수모도 겪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의현 스님은 스리랑카 비구니계맥 복원과 인도불교 재건에 앞장섰다. 스리랑카 비구니계맥 복원은 의현 스님이 정화운동 때부터 시봉했던 자운 스님의 평생 원력이기도 했다. 의현 스님은 1996년 12월8일 인도 녹야원에서 서암 스님을 전계대화상으로 비구니 수계식을 진행했다. 이때 수계를 받은 10명의 스님들을 기점으로 현재 스리랑카 등지에는 5000명의 비구니스님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님은 또 인도불교 재건을 위해 2015년 인도 우따라 쁘라데쉬주 수바흐르티 종합대학에 불교대학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의현 스님이 종단의 전면에 다시 거론된 것은 2015년 6월18일이었다. 조계종 호계원은 이날 의현 스님과 관련한 재심을 진행하고 공권정지 3년으로 경감했다. 당시 호계원은 1994년 초심호계원의 심판결정이 징계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아 징계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의현 스님이 1994년 개혁회의로부터 멸빈 징계를 받은 지 21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종단 내부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많은 이들이 징계확정 이후 20여년이 지난 상황에서 호계원이 갑작스럽게 재심을 열어 징계경감을 결정한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불교계 일부단체와 언론들은 “의현 스님이 최모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뒀고, 총무원장 재임시절 자신의 여비서를 성폭행한 전력이 있다”며 의현 스님의 범계 의혹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이미 검찰조사와 법원 판결 등을 통해 허위주장이었음이 입증된 상태였다. 국립경찰병원은 1988년 6월 최모 여인에 대한 산부인과 진찰결과 “출산한 경력이 없다”는 진단서를 발급한 바 있었다.(국립경찰병원장, 1988년 6월1일 소견서-발행번호 4147) 서울지검도 1993년 9월14일 “의현 스님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총무원장 여비서 오모씨에 대해 무고혐의로 구속한 바 있었다.(한겨레신문, 1993년 9월15일자) 오모씨는 1심 재판에서 무고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데 이어 1994년 4월21일 서울지법 항소심 심판에서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동아일보, 1994년 4월22일자) 그럼에도 의현 스님에 대한 재심판결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부도덕하고 반개혁적 인물’ ‘독재자’ 등 의현 스님을 향한 견고한 프레임 때문이기도 했다. 의현 스님이 다시 종단구성원으로 인정되기까지는 그로부터 4년이 더 지나서였다. 스님은 ‘2020년 조계종 승려분한신고’를 통해 마침내 승적을 회복했다. 이어 2021년 10월21일 대구 동화사에서 수행 및 지도력의 상징인 대종사 법계를 품서했다. 그리고 의현 대종사는 올해 3월29일 조계종 중앙종회로부터 팔공총림 제2대 방장으로 추대됐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677호 / 2023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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