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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승려대회서 ‘자주화’ 선언…불교재산관리법 폐지 견인

총무원장 취임 이후 정부 향해 강성발언…10·27법난 폭거로 규정
노태우 불자 후보 내세워 불교계 숙원 ‘불교방송국 허가’ 얻어내
강영훈 국무총리 특별담화 통해 “10·27법난 유감·피해보상”약속

한국불교의 자주화 선언으로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모왔던 1986년 9월7일 해인사 승려대회.
한국불교의 자주화 선언으로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모왔던 1986년 9월7일 해인사 승려대회.

조계종 제25대 총무원장 의현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불교의 자주화”를 기치로 내걸고 정부와 대척점에 섰다. 1986년 9월7일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해 “불교 자주성 회복과 불교관련 악법 철폐”를 요구했다. 이날 승려대회에는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를 비롯해 전국에서 2000여명의 스님이 참석했다. 조계종이 불교 내부문제로 승려대회를 개최한 적은 많지만 정부의 불교시책을 두고 승려대회를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불교재산관리법·자연공원법 등 불교관계 악법 즉각 철폐 △사원의 관광유원지화 중지 △1980년 10·27법난에 대한 책임과 해명 △특정종교 편향의 교과서 왜곡 중지 △TV 등 언론의 편파왜곡보도 시정 등 10개 결의안이 채택됐다. 이날 의현 스님은 “그때까지 언급조차 금기로 여겨온 10·27법난을 폭거로 규정”하고, “불교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호국불교의 개념을 특정정권이 아닌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조계종사 근현대편’) 그동안 보수적이고 친정부 성향을 보였던 역대 총무원장과 다른 의현 스님의 강성 발언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언론도 큰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1986년 9월9일자)’는 사설을 통해 “조계종이 승려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은 종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매우 대담하고도 신랄한 현실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며 “조계종이 범종단적 차원에서 이런 자주선언을 하고 나온 것은 해방 이후 처음 있는 것으로 실로 충격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종단 내부의 결속을 가져왔다. 조계종 전국교구본사주지 스님 등이 중심이 된 중진스님 30여명은 9월10일 해인사 승려대회 결의를 지지하고 불교관계법령 개폐 등에 대한 구체적인 추진 방안은 총무원에 위임하기로 결의했다. 대한불교청년회, 전국신도회에 이어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는 스님들도 잇따라 성명을 내고 해인사 승려대회 결의를 지지했다. 이를 토대로 의현 스님은 우선 불교재산관리법 개정을 추진했다.

1963년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은 일제강점기 불교재산과 행정을 총독부 산하에 귀속시켰던 ‘사찰령’에 뿌리를 뒀다. 비구·대처갈등 과정에서 사찰주지가 불교재산을 임의대로 처분하는 일이 빈번하자 이를 제한하기 위해 도입된 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임 사찰주지는 해당 시군에 등록을 해야 하고, 사찰의 증개축은 물론 개보수 때마다 까다로운 승인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 독소조항이 많아 불교계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악법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더구나 지금도 그렇지만 중첩 규제된 각종 법률이 전통사찰을 옥죄면서 사찰은 종교적 활동마저 제약받았다. 그렇기에 의현 스님은 “정부의 적절한 조치가 조만간 실현되지 않을 경우 젊은 승려들의 열화 같은 요구를 감당할 여지가 없다”(‘월간경향’ 1986년 11월호)고 정부측에 불교재산관리법 폐기를 촉구했다.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씨를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박씨는 독실한 불자집안에서 자란 학생이기도 했다. ‘동아일보(1987년 1월19일자)’에 따르면 이 소식을 접한 의현 스님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천상천하유아독존’은 하나의 인권선언”이라며 “치안기관에서 고문으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박씨의 빈소에 총무원 간부를 보내 분향토록 하고 유가족들에게 조의금을 전달했으며 3월3일 서울 조계사에서 범종단차원의 49재를 봉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은 ‘박종철 49재’를 1주일여 앞둔 2월25일 기자회견을 열어 당초 조계사에서 열기로 했던 49재를 부산 사리암으로 변경했다. ‘동아일보(1987년 2월25일자)’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2월24일 사리암에서 봉행된 박종철군의 6재에 직접 참여해 박군의 아버지에게 조의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유족이 49재를 사리암에서 해달라고 요청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변경 이유를 설명했다. “가족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지만, 전두환 정권의 강한 압력이 작용했을 수 있었다.

정부는 “3월3일 조계종 차원의 사리암에서 진행하는 49재는 순수한 종교행사 차원에서 허용하겠지만, 그 외의 단체가 진행하는 행사는 불법집회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단체 등은 국민평화대행진을 진행하기로 했고, 청화·지선 스님 등이 중심이 된 불교단체들도 조계사에서 49재를 봉행하기로 했다. 결국 3월3일 전국에서 시민과 경찰이 충돌했으며, 서울 조계사 앞에서도 스님과 신도 등 500여명과 경찰 간의 대립이 이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정토구현전국승가회를 중심으로 한 불교단체들의 민주화 요구 열기도 차츰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무시하고 4·13호헌조치를 발동했다. 국민들의 반발은 커져갔다. 불교계도 진보적 성향의 스님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호헌철폐와 불교재산관리법 개정을 요구하며 대정부 반대시위를 이어갔다. 불교계 단체들은 그해 5월18일 광주 원각사에서 ‘5·18민중항쟁 추모재’를 봉행했다. 그러나 이날 경찰은 원각사 법당에 최루탄을 발포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해인사, 법주사, 운문사 학인스님 등은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기도를 진행했고, 전국의 스님과 불자들도 정부 비판에 목소리를 높였다.

총무원장 의현 스님도 5월27일 광주 원각사 앞 금남로에서 열린 ‘원각사 법당 난입 최루탄 투척 규탄 대법회’에 참석해 정부에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동아일보(1987년 5월28일자)’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이날 법회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비폭력 단식투쟁은 최루탄이나 총칼로도 막을 수 없다”면서 “불교인은 유한한 정치보다 무한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교자적 자세로 정법수호에 힘써 나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은 대정부 강경노선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스님은 대중 집회에서 정권을 겨냥한 강성발언을 내놓으면서도 정권 수뇌부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때론 “개인적으로 4·13호헌조치를 지지한다.” “전두환 대통령을 중심으로 어려운 난제들이 슬기롭게 풀려나갈 것으로 기대한다.”(불교신문, 1987년 4월22일자) 등 정권에 우호적인 발언들도 내놓았다.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불자’임을 내세워 지지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국회는 1987년 11월 ‘불교계의 자율권을 심각히 훼손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불교재산관리법’을 폐지하고, 불교계 의견이 반영된 ‘전통사찰보존법’을 대체입법으로 성안했다. 노태우 후보도 ‘불교방송 개국허가’를 대선공약으로 반영했다. 결과적으로 의현 스님의 이런 행보는 불교계의 숙원 해결로 이어졌지만, 훗날 ‘어용’ 논란에 휩싸이는 배경이 됐다. 그렇더라도 ‘불교재산관리법 폐지’ ‘불교방송국 개국’ 등이 정권의 도움 없이 결코 쉽지 않았을 당시 상황에서 총무원장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의현 스님이 훗날 “어용이니 뭐니 비판을 해도 개인을 위해 어용한 적은 없다. 내가 정치인과 권력자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불교재산을 되찾고, 불교방송국을 세우는 등 불교계의 숙원사업들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가 어용을 했다면 그것은 불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월간조선’, 1996년 8월호)고 항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방송국 개국과 중앙승가대 인가대학으로의 승격아래 왼쪽부터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 이뤄낸 성과였다.
불교방송국 개국과 중앙승가대 인가대학으로의 승격아래 왼쪽부터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 이뤄낸 성과였다.

의현 스님은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적 수완으로 종단 안팎의 혼란을 점차 안정시켜 나갔다. 불교방송국 및 불교중앙회관 건립과 중앙승가대 정규대학 인가 등 종단중흥을 위한 불사도 하나하나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국회가 1988년 6월 ‘5공 비리특위’를 구성해 전두환 정권의 비리에 대한 진상규명에 착수했다. 청문회가 진행되면서 ‘일해재단 비리’ ‘광주민주화항쟁 강제진압’ ‘언론학살’ 등 신군부가 자행한 비리들이 속속 밝혀졌다. 불교계도 ‘10·27법난’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월주 스님 등 중진 46명은 1988년 11월22일 ‘10·27법난 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0·27법난의 입안 및 시행, 수사과정을 5공 비리특위 차원에서 철저히 밝혀 달라”고 촉구했다. 의현 스님은 월주, 정휴 스님과 함께 12월21일 문공부 장관을 만나 “10·27법난에 대한 정부 측의 사과”를 요구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그러자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는 그해 12월30일 특별담화를 내고 “80년 10월27일 비상계엄 하에 진행됐던 불교계 수사로 불교도와 불교의 자존에 깊은 상처를 입히게 됐던 점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강 총리는 이어 “정부는 이 사건으로 피해를 본 불교계에 보상과 실추된 권익회복과 불교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0·27법난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이 이뤄지지 않아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였지만 불교계로서는 정부차원의 첫 공식사과라는 점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는 그해 11월23일 인제 백담사에서 칩거를 시작했다. ‘5공 비리특위’가 가동되면서 거세진 비판여론을 피해가기 위한 것이었다. 의현 스님은 이들의 백담사행을 주선했으며, 수시로 들러 편의를 제공했다. 이에 대해 의현 스님은 “약자를 돌보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다”(‘월간조선’, 1996년 8월호)고 회고했지만, 결과적으로 종단 내부에서 반발여론이 커지게 한 배경이 됐다. 

1989년 조계종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문공부는 그해 3월2일 불교방송국 설립을 위한 재단법인 설립을 인가했으며 무선국허가도 승인했다. 이에 따라 1990년부터 불교방송국은 첫 전파를 송출할 수 있게 됐다. 1987년 불교방송국 설립을 추진한 지 2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조계종을 향한 훈풍은 이어졌다. ‘동아일보(1989년 5월20일자)’에 따르면 중앙승가대는 그해 5월 교육부로부터 대학학력인정 각종학교로 인가받았다. 1979년 설립된 이후 비인가학교로 머물러 있던 중앙승가대가 처음으로 4년제 대학에 준하는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불교방송 개국에 이어 또 하나의 불교계 숙원사업이 성취된 셈이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677호 / 2023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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