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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종단조계종 출범 후 4년 임기 채운 첫 총무원장

봉암사 결사 때 성철 스님 시봉…선지식들 법담 들으며 불교 익혀
한국전쟁 때 해인사 장경각 지붕에 태극기 덮어 팔만대장경 구해
10·27법난 신군부 만행 규탄하다 서빙고실로 끌어가 모진 고문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 의현 대종사는 현대한국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스님은 봉암사 결사, 불교정화운동, 1970~80대 종단사태, 10·27법난 등 ‘격동의 조계종사’를 대변하는 주요사건들을 지켜본 목격자였고, 때론 그 중심에 서기도 했다. 혼란이 극심했던 1980년대 중반, 총무원장에 취임해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후 처음으로 4년 임기를 채웠으며, 재임까지 이뤄냈다. 총무원장 재임기간 불교방송 개국과 중앙승가대 4년제 인가, 불교텔레비전 개국의 초석을 다지는 등 당시 한국불교의 수많은 숙원과제들을 해결하는 성과도 냈다. 그럼에도 1994년 개혁회의로부터 ‘반개혁적 인물’로 낙인찍혀 종단 밖으로 내몰리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렇기에 의현 스님이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으로 추대되기까지의 과정은 굴곡 많았던 현대불교사와 궤를 같이한다. 

스님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면서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신심 깊었던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절을 찾는 일이 많았고, 이는 출가 인연으로 이어졌다. 13세 되던 해 외할머니를 따라 부산 기장의 묘관음사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향곡 스님을 만나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 무렵 향곡 스님은 성철, 청담, 자운 스님 등과 문경 봉암사에서 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향곡 스님을 따라 봉암사로 향한 의현 스님은 그곳에서 성철 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의현 스님이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행자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대중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일은 모두 행자의 몫이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다. 생식을 했던 성철 스님을 위해 들에 나가 나물을 뜯고, 불린 쌀을 맷돌에 갈아 공양 올리는 것도 의현 스님의 소임 가운데 하나였다.  

몸은 고됐지만, 봉암사에서의 행자생활은 의현 스님에게 불교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성철 스님은 자신이 머물던 봉암사 조실채에서 청담, 자운, 향곡 스님 등과 늘 부처님 법을 주제로 법담을 나눴다. 향곡 스님과는 선(禪)을 주제로, 자운 스님과는 계율을 주제로 폭넓은 대화를 이어갔다.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의현 스님은 자연스럽게 이 스님들의 법담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부처님 법을 두고 이어지는 선지식들의 치열한 법담은 훗날 의현 스님이 출가수행자로 살아가는 지침이 됐다.

그러나 봉암사 결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빨치산의 잦은 출몰과 군경의 소탕작전이 반복되면서 수행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의현 스님은 성철 스님을 따라 봉암사를 나왔다. 부산 묘관음사를 거쳐 다시 고성 문수암에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은 무서운 속도로 남하했고, 남쪽 땅 곳곳에 인공기가 펄럭였다. 성철 스님과 헤어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성철 스님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어느 날, 의현 스님에게 “해인사로 가라”고 했다. “해인사에 가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성철 스님의 당부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길로 해인사로 향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장은 급변했다. 퇴각에 실패한 인민군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 일대에도 인민군 부대가 주둔했다. 낮에는 숲에 숨어있다가 밤이면 나타나 마을을 약탈했다. 유엔군 비행기 편대는 수시로 폭격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했다. 해인사 장경각이 잿더미로 변화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해인사 원주를 맡고 있던 법홍 스님이 지혜를 냈다. 법홍 스님은 대중들과 밀가루 포대를 엮어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다. 의현 스님은 새벽마다 장경각 지붕에 올라 태극기를 펼쳤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태극기를 걷어 들이는 일을 반복했다. 해인사에 대한민국과 팔만대장경을 수호하고 있는 스님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이 때문인지 해인사 장경각과 팔만대장경은 전쟁의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성철 스님이 왜 자신을 해인사로 보냈는지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의현 스님은 1952년 해인사에서 상월 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상월 스님은 계율에 밝은 율사로 가야총림 해인사의 전계대화상을 지낸 스님이었다.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석우 스님의 사제로, 금강산 마하연 등에서 함께 수행하다 해인사에서 주석했다. 의현 스님은 봉암사 결사 때부터 인연 맺은 성철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싶었지만, “상월 스님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석우 스님의 간곡한 당부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석우 스님과 사형사제간이었던 상월 스님과의 인연은 이후 의현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하고, 동화사 문중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배경이 됐다. 1954년 불교정화운동이 본격화되자 비구승들은 석우 스님을 해인사 조실로 추대한 데 이어 1955년 8월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했다. 이후 조계종은 동화사에 머물던 비구니스님들을 운문사로 보내고, 종정 석우 스님을 동화사 조실로 추대했다. 이때부터 동화사는 석우 스님의 상좌와 사제 등이 중심이 된 문도회에서 차례로 주지와 조실 등을 맡아 스님의 수행가풍을 이어오고 있다. 팔공총림 초대 방장이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진제 대종사도 석우 스님의 상좌이다. 의현 스님과는 사촌지간인 셈이다. 

이 무렵 석우 스님을 시봉했던 의현 스님도 1954년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회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정화운동에 나섰다. “율장정신 회복”을 외친 자운 스님 등을 보필하며 정화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그해 11월 의현 스님은 금오, 청담, 자운 스님 등과 함께 조계사에 진입하다 폭력사태가 발생해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불교정화운동이 진정국면에 접어들자 스님은 사찰 불사에 매진했다. 1967년 문경 대승사 주지를 맡아 화재로 전소되다시피 했던 사찰을 복원했고, 동화사 주지로 부임해 금당선원을 비롯해 염화실, 설법전, 동화문 등을 잇따로 복원했다. 동화사 전각 가운데 의현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은해사 주지를 맡아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망실된 삼보정재를 되찾는 데 앞장섰다. 임야 600만평과 전답 등을 은해사로 환수했고, 사하촌 주차장 운영권도 은해사로 돌려놨다. 주차장 이용으로 조성한 기금은 훗날 은해사가 선화여고를 인수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태고종 관암사가 관리하던 팔공산 갓바위(선본사)를 은해사가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조계종이 역경·도제양성·포교라는 ‘종단 3대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2015년 6월22일, 은해사 주지 돈관 스님)

탁월한 종무행정과 특유의 친화력은 스님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종단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스님은 1969년 12월 서른셋의 나이에 제2대 중앙종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됐다. 이어 3~8대 중앙종회의원에 잇따라 선출됐고, 1980년대 들어 월주, 초우, 진경, 천장, 봉주, 벽파 스님 등 40대 중진그룹과 더불어 종단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이 종단의 중심으로 성장하기까지 순탄한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스님은 1980년 10·27법난 당시 “신군부의 만행을 규탄”하는 발언으로 보안사 서빙고실에 끌려가 1달여간 모진 고문을 받았고, 풀려난 이후에도 신군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1981년 6월 7대 중앙종회의장으로 피선됐지만, 당시 총무원장 초우 스님과의 갈등으로 6개월 만에 동반 퇴진했다. 1983년 1월에도 중앙종회의장에 선출됐지만, 그해 8월 신흥사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중앙종회가 해산되고 비상종단이 출범하면서 다시 중앙종회의장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럼에도 의현 스님은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종단이 혼란할 때마다 총무원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됐다.

의현 스님이 조계종 제25대 총무원장에 선출된 것은 1986년 8월이었다. 이 무렵 조계종은 총무원장 녹원 스님이 동국대 이사장을 겸직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당시 동국대 이사장은 총무원장과 더불어 종단의 상징적인 위치였다. 때문에 총무원장이 동국대 이사장을 겸직하는 것은 종단 내부의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녹원 스님은 8월22일 기자회견을 열어 총무원장 사퇴를 선언했다.

중앙종회는 8월25일 녹원 총무원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새 총무원장 선출을 진행했다. 이날 총무원장 후보로는 의현 스님과 밀운 스님이 나섰다. 당시 의현 스님은 중앙종회 내에서 유력한 총무원장 후보로 거론돼 온 대표 주자였고, 밀운 스님은 2년간 부원장을 역임하며 녹원 총무원장 체제를 견인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두 스님의 대결은 중앙종회와 전임 총무원 집행부 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비쳐졌다.

무기명비밀투표 결과 의현 스님이 참석의원 67명 중 2명이 기권한 가운데 48표를 얻어 당선됐다. 의현 스님은 당선과 함께 “반년 동안 종단을 운영하면서 제 자신이 총무원장으로서 수행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면서 “6개월 동안 한국불교의 방향을 잡는 데 모든 힘을 쏟아보겠지만, 6개월 후에도 방향타가 잡히지 않을 경우 명예롭게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종단발전에 매진하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677호 / 2023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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