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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순례] 인류 문화유산과 천혜의 절경 어우러진 ‘세계 불교 종주국’

  • 특별기획
  • 입력 2023.04.24 16:09
  • 수정 2023.05.10 16:27
  • 호수 1678
  • 댓글 1

BBC 등이 뽑은 세계적 여행지
불자에겐 인도 버금가는 성지
440년간 서구 식민지 겪었지만
2300년 법등 이어오고 있어

2400년 된 보리수 여전히 건재
불교경전 처음 문자 정착 등
곳곳이 생생한 불교역사 현장 
불교, 대중들 속 깊이 자리잡아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스리랑카의 랜드마크 시기리아팔레스. 바위산 위 사자궁전은 아버지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왕 카샤파의 두려움과 헛된 욕망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스리랑카의 랜드마크 시기리아팔레스. 바위산 위 사자궁전은 아버지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왕 카샤파의 두려움과 헛된 욕망을 보여준다.

‘동양의 진주’ ‘인도양의 보석’이라 불리는 스리랑카는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찬탄했고, BBC가 2002년 선정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50’에도 포함됐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10대 해변 중 하나도 스리랑카에 있으며, 세계 서핑의 수도로 일컬어진다. 게다가 세련된 숙박시설에 다양한 먹을거리는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실제 바닷가 등 휴양지에는 젊은 남녀나 가족단위의 서양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리랑카는 여행자뿐만 아니라 불자들에게도 각별하다.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 스님에 의해 전해진 법의 등불은 오늘날까지 환히 타오르고 있다. 2300여년간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는 불교국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불교역사를 지닌 스리랑카는 상좌부 불교의 고향을 넘어 명실상부한 세계 불교의 종주국이 아닐 수 없다.

‘위대한 섬’을 의미하는 스리랑카는 인도대륙 밑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스리랑카는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인도와 교류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해갔다. 불교 전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인도를 평정한 아쇼카왕(재위 BC 268~232년경)은 불법을 크게 일으킨 전륜성왕이었고, 9회에 걸쳐 외국으로 전법사를 파견했다. 기원전 264년 아쇼카왕의 아홉 번째 아들이었던 마힌다 스님도 부왕의 뜻을 받들어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그 여정에는 4명의 장로와 사미도 함께 했다. 이들은 싱할라왕국을 다스리던 왕 데바남피야팃샤를 만나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다. 왕은 환희에 겨워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불교에 귀의했다. 스리랑카불교의 시작이었다. 그 법의 등불은 다시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옮겨가 무명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범부중생들의 눈을 밝혀주었다.

불상을 이운하고 있는 재가불자들.
불상을 이운하고 있는 재가불자들.

다민족 국가인 스리랑카는 오랜 세월 내전과 외부 침략에 시달렸다. 특히 1505년부터 1948년까지 440년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 통치를 잇따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찬란했던 전통문화와 사상을 꿋꿋이 이어갔다. 희박해진 정체성에 이슬람의 침략까지 겹치자 급격히 스러져갔던 인도불교와는 다른 스리랑카불교의 저력이었다.

스리랑카 관광청이 3월30일부터 4월4일까지 진행한 언론인 초청 프로그램은 스리랑카의 역사와 문화유산, 천혜의 자연을 직접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스리랑카는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인도에 버금가는 불교성지로 ‘사자국’이라 불리던 스리랑카를 순례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멀리는 5세기 중국의 법현 스님부터 가깝게는 일제강점기 영재 스님(英宰, 1900~1927)에 이르기까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스리랑카항공이 인천공항에서 콜롬보로 가는 직항노선을 매주 운영하고 있어 불과 8시간가량이면 ‘남방의 법등’ 스리랑카에 도착할 수 있다. 옛 구법승들이 보면 기적이라 부를 만한 놀라운 변화다.

전 국민의 70%가 불교를 신행하는 스리랑카에는 일상 깊숙이 불교가 스며있다. 마을 입구나 시내 한복판에 큼직하게 불상을 조성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사찰에는 청신남과 청신녀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정결함을 상징하는 하얀 상하의를 갖춰 입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려는 듯 맨발로 걸음을 옮기는 그들에게서 고운 신심이 묻어난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에 의해 건설된 갈레 구시가지.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에 의해 건설된 갈레 구시가지.
스리마하보디 사원의 2400년 된 보리수.
스리마하보디 사원의 2400년 된 보리수.
시내 한복판에 모셔진 거대한 불상. 스리랑카가 불교의 나라임을 보여준다.
시내 한복판에 모셔진 거대한 불상. 스리랑카가 불교의 나라임을 보여준다.

스리랑카는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도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 ‘폴론나루와 고대도시’ ‘담불라의 황금 사원’ ‘시기리야 고대도시’ ‘캔디 신성 도시’ ‘갈레 구시가지와 요새’ 등 6건이나 된다. 남한의 3분의 2 크기의 작은 섬이지만 문화유산에 있어서는 강국이다. 거대한 사원건축과 석굴사원 조성, 불상과 불화에서도 예술의 진면목을 찾아볼 수 있다.

스리랑카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담불라 황금 석굴 사원. 
스리랑카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담불라 황금 석굴 사원. 
스리랑카에서는 풍광이 아름답고 맑은 하늘도 자주 볼 수 있다. 누와라 엘리야 지역의 그레고리 공원 및 호수.
스리랑카에서는 풍광이 아름답고 맑은 하늘도 자주 볼 수 있다. 누와라 엘리야 지역의 그레고리 공원 및 호수.

이번 스리랑카 순례에서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과 여러 사찰들을 방문했다. 담불라 황금 석굴 사원도 그중 하나다. 1400년 동안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 남쪽으로 72km 떨어진 담불라 사원은 370m 높이의 랑기리 바위산 중턱인 180m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성지 중 하나인 이곳에는 총 153구의 불상과 3개의 스리랑카 왕의 석상, 힌두교의 비쉬누와 여신상도 4구가 있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을 이 석굴이 사원으로 바뀐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타밀족 침략을 받은 왓타가마니 왕이 수도를 빼앗기자 이곳으로 피신해 스님들의 보호 속에 힘을 키워나갔고 훗날 왕위에도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왕이 불법승 삼보에 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대대적인 석굴 조성 불사에 착수한 것이 담불라 사원이다. 천연 동굴에다 다시 암석을 다듬어 마치 피가 흐르듯 생생히 표현해낸 거대한 열반상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당대 스리랑카의 문화적 역량과 기술력, 민족적 자긍심, 불교신심이 총 결집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패엽경을 만들고 있는 알루위하라 스님.
패엽경을 만들고 있는 알루위하라 스님.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의 하나로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진 불치사.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의 하나로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진 불치사.

담불라 석굴 사원이 불교예술의 정점을 보여준다면, 아누라다푸라의 스리마하보디는 스리랑카 불교신앙의 중심이다. 이곳 역사는 스리랑카불교의 탄생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힌다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왕이 귀의하자 왕비 아눌라도 출가의 뜻을 밝혔다. 왕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정작 비구니계를 전할 스님이 없었다. 이때 마힌다 스님이 떠올린 인물이 여동생 상가미타 스님이었다. 이 뜻을 전해들은 상가미타 스님은 전법의 뜻을 굳혔고 아쇼카왕은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딸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목도한 보리수 가지를 꺾어 건넸다. 상가미타 스님과 바닷길을 건너 스리랑카에 도착한 보리수는 왕이 보시한 마하메가완나숲에 심어졌다. 이때부터 보리수는 스리마하보디로 불리며 사람들의 마음에 깊고 단단하게 뿌리 내렸다. 수많은 사찰에 스리마하보디의 가지가 옮겨 심어졌고 불법도 널리 확산됐다. 지금도 많은 불자들이 탑돌이를 하듯 보리수 주변을 돌고, 꽃과 청수를 올리며, 경전을 독송한다. 수령 2400년이 된 보리수는 스리랑카불교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담불라 석굴에서 남쪽으로 40km가량 떨어진 마탈레의 사원 알루위하라는 불교사의 일대 전환을 가져온 역사적 현장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온 국토가 전쟁에 휩싸이고 승가도 심각한 위기에 내몰렸다. 구전으로 이어오던 법의 전승을 예측할 수 없게 되자 500여명의 스님이 알루위하라에 모여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단행했다. 특히 오랜 세월 말로 전해오던 경·율·론 삼장을 일일이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야자수 일종인 패다라수 잎사귀를 찌고 말린 잎사귀에 새겨졌다. 패엽경의 탄생이었다. 5세기 인도의 대학승 붓다고사 스님이 싱할라왕국에 건너온 것도 패엽경을 보기 위해서였으며, 이론·수행체계를 집대성한 ‘위숫디막가(청정도론)’도 알루위하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세기 초 스리랑카를 침탈한 영국은 독립운동 거점이던 알루위하라 소탕 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패엽경을 찾아내 이를 영국으로 반출했다. 이후 팔리성전협회를 중심으로 패엽경을 연구·번역하고 배포함으로써 불교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지식인 사회에 깊이 자리 잡았다. 지금도 알루위하라는 야자수 잎을 찌고 말려 패엽경을 만드는 오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스리랑카에는 유서 깊은 불교성지가 많다.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싱할라 건축 양식의 불치사, 기원전 2세기 103m(지금은 55m) 높이로 조성된 탑인 루완웰리사야다고바, 최초의 사원 이수루무니아, 부처님이 하늘을 날아 찾아오셨다는 켈라니야의 라자마하위하라, 사방이 절경으로 탁 트인 현대식 사찰 넬리갈라 국제불교센터도 불자들의 필수 성지순례 코스다. 이밖에 높이 195m 바위산 위에 건설한 스리랑카의 랜드마크 시기리아팔레스, 세계인들의 차 실론티의 산지 우바,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이 식민지 기간 동안 만들어나간 유럽풍의 도시 갈레의 색다른 고풍스러움도 빼놓을 수 없다.

바닷가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 
바닷가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 
                              스리랑카에는 아름다운 폭포가 많다. 사진은 라바나 폭포.
                              스리랑카에는 아름다운 폭포가 많다. 사진은 라바나 폭포.

지구에서 가장 사랑받는 섬으로 꼽히는 스리랑카는 순박한 심성의 사람들, 종교적인 열정과 성스러움,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과 그에 얽힌 흥미진진한 얘기들, 그림같이 펼쳐진 대자연의 감동과 마주하도록 한다.

왼쪽부터 스리랑카 순례에 동참한 남동우 BTN불교텔레비전 부장, 이성수 불교신문 기자, 이재형 법보신문 편집국장, 김주일 현대불교신문 편집국장, 이현구 BBS 보도국 부장.
왼쪽부터 스리랑카 순례에 동참한 남동우 BTN불교텔레비전 부장, 이성수 불교신문 기자, 이재형 법보신문 편집국장, 김주일 현대불교신문 편집국장, 이현구 BBS 보도국 부장.

스리랑카=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678호 / 2023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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