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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총림 수덕사 주지 도신 스님

“‘큰 절 주지는 종살이’ 뼈에 새기며 덕숭총림 찬연히 일굴 터!”

8살 때 덕숭산에 입산
법장 스님과 은사 인연

중광 스님 ‘무상‧중도’ 삶
지켜보며 인식의 대전환

중생 위로하려 ‘노래’
40년 음성포교 인정 

따듯한 언어 찾으며 작사
자연스레 시를 만나 등단

강원 뛰쳐나온 제자에게 
은사, “도망 가지마라!”

35년 만에 검정고시 준비
8년 만에 대학원 석사

‘관음 미소’ 늘 우리 곁에 
간절한 기도에는 ‘가피’

“내가 웃으면 맑은 별 떠
모두 웃으면 은하수”

수덕사 주지 도신 스님은 “자신 안에 행복의 실상이 모두 구족 돼 있음을 알게 되면 행복을 좇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덕사 주지 도신 스님은 “자신 안에 행복의 실상이 모두 구족 돼 있음을 알게 되면 행복을 좇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서(湖西)의 금강산(金剛山)’이라 불리는 덕숭산의 우거진 녹음 사이사이로 날아든 꽃향기가 절의 뜨락에 내려앉는다. 산사가 내어 준 숲속의 오솔길 어디를 걸어도 싱그러움과 달콤함을 만끽할 수 있는 화창한 봄이다. 산사의 정취에 한참을 취한 후 지난 3월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로 임명받은 도신(道信) 스님을 청련당에서 친견했다. 
 

정혜사 노적 바위.
정혜사 노적 바위.

원인 모를 이유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살길을 찾아 자식 곁을 떠났다. 그때 세 명의 여동생 금자, 마리아, 금순은 해외로 입양됐고 8살의 아들은 비구니스님을 따라 덕숭산으로 들어섰다.(1969) 큰 절에 맡겨진 아이들은 이미 많았다. 하여, 수덕사 바로 위의 절 정혜사로 올라갔고, 그곳에 주석하고 있던 수덕사 방장 벽초경선(碧超鏡禪‧1899~1986) 스님을 8년 가까이 시봉했다. 

정혜사(定慧寺)에 머물 때 도량 주변에 서 있는 노적 바위에 참 많이 올라갔더랬다. 대중 스님들 눈을 피해 잠깐이나마 낮잠을 잘 수 있고, 서산에 걸린 달도 마음 편히 볼 수 있어 좋았다. 한 공간에만 머무는 게 좀 답답하다 싶으면 인근의 전월사(轉月舍)로 달려가 만공월면(滿空月面‧1871∼1946) 스님이 정진했던 좌선대에 앉아 ‘탁 트인 풍광’을 안았다. 동자승의 유일한 위안이었을 터다.

“어렸을 때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뿐이어서 별문제 없었는데 사춘기 접어들며 상념에 젖곤 했습니다. 여동생들을 향한 그리움이 깊을수록 자식들을 두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커갔습니다.” 

정혜사에서 혼쭐이 나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큰 절로 내려온 동자승을 넓은 가슴으로 품어준 건 은사인 인곡법장(仁谷法長‧1941∼2005) 스님이다. 어머니를 향한 애증에 힘겨워하는 도신을 묵묵히 지켜봐 준 것도, 정혜사에 머물러있는 제자를 법주사 승가대학으로 보낸(1977) 장본인도 법장 스님이다. 

그러나 제자는 은사의 뜻에 ‘반하는 행동’만 했다. 법주사 승가대학에서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뛰쳐나왔다. 절에서는 ‘한오백년’ 등의 노래를 읊조리곤 했는데 ‘걸레 스님’이라 자청하며 화가로 활동했던 중광(重光‧1934∼2002) 스님이 우연히 듣고는 “목탁보다 기타가 어울린다”라고 했다. ‘인연이자 기회’라 여기고는 곧장 상경했다.(1979) 

중광 스님 곁에 머물며 선과 색에 맛을 들여가던 즈음 한국 록(Rock)의 대부 신중현, ‘울고 싶어라’ 노래로 잘 알려진 이남이 가수와 친분을 맺으며 작곡법을 배웠다. 그 후, 기타 연주하며 노래하는 게 ‘업’이 되었다. 바둑에도 남다른 기재를 보여 아마추어 계에서는 ‘고수’로 통했다.
 

오솔길 어디를 걸어도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
오솔길 어디를 걸어도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

촌음도 아껴가며 정진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할 수행자가 바둑 두어가며 노래를 부른다는 건 ‘신선놀음에 취한 한량’으로 치부될 때였다. 은사 스님의 눈에 들어 온 기타는 모두 산산이 조각났다. 서산 간월도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있을 때 은사 스님은 어찌 알았는지 느닷없이 들이닥쳐 “금쪽같은 시간을 노래나 부르며 낭비하느냐?”라며 호통쳤다. 그래도 노래는 멈출 수 없었다.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저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면 바다 건너의 동생들이 저에게 연락해 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중광 스님과 보내는 시간이 쌓이며 ‘노래하는 이유’가 달라졌다. 

“‘매이지 않는다’라는 게 무엇인지 중광 스님의 삶을 통해 알았습니다. 방 이쪽에 선풍기가 있고, 저쪽에 옷이 걸려 있고, 또 다른 구석에 책이 놓여 있습니다. 중광 스님은 선풍기와 옷의 위치가 바뀌어도 괘념치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기 있어야 할 선풍기가 왜 여기 있나?’ 하고 신경이 쓰였습니다. 책의 위치마저 바뀌어 뒤죽박죽되면 짜증도 납니다.”

중광 스님은 ‘어지럽게’ ‘아무렇게’ 산 게 아니다. 일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나와 상대의 감정표출에 따라 불거지는 ‘선악‧미추’에 동요하지 않은 것이다.

대웅전에도 꽃향기가 배어간다.
대웅전에도 꽃향기가 배어간다.

동생과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누었다. 그때마다 중광 스님은 “그대로 놓아두라!”라며 다독여주었다. 위로받을 때는 “그렇지!” 하며 평온을 찾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큰 파문이 일었다. 중광 스님과 보낸 10여 년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파문이 잦아든 고요한 호수를 마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어난 원망과 애증도 지나가게 할 뿐 잡아서는 안 될 것들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인연에 따라서 붙는 삶의 고통은 저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보다 더 큰 고통을 안고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중광 스님에게 위로받았듯 도신 스님도 그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부처님 말씀, 따듯함이 배인 노랫말을 지어 한국 전통적 선율(국악가요)에 얹었다. 첫 앨범인 ‘도신의 국악가요’는 30여만 장이 팔려나갔다.(1992) 당시 음반 시장에서 성행했던 ‘녹음 테이프’ 제작‧유통까지 고려하면 50만 장은 족히 보급되었을 것이다. 개인 앨범은 6집까지 선보였고, 곡 대부분은 직접 작사‧작곡했다. ‘40년 음성포교’를 인정받은 도신 스님은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2019)

“돌이켜보면 무모하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출가한 스님이라면 음악 세계에 뛰어들기 전에 신중해야 합니다. 동생을 찾기 위해 노래해서는 안 됩니다. 명성이나 재물을 위해 무대에 올라서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포교‧전법’이 전부여야 합니다!”

작사의 깊이를 더하다 보니 자연스레 시(詩)를 만났다. 월간 문예지 ‘우리 시’에 당선(2018)된 후 시집 ‘웃는 연습’을 선보였다.(2022) 그런데 표지에는 ‘도신 시집’이 아니라 ‘박금성 시집’으로 새겨져 있다. 유년과 청년의 시절을 기억하며 떠올린 시이기에, 세간의 추억을 갈무리하기 위해 ‘속명’을 썼을 듯싶다. 하여, 시들의 행간에는 ‘짙은 그리움’이 흐른다. 그러나 ‘붙잡으려는 그리움’이 아니라 ‘풀어내어 놓아 주려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시 한 줄 써 가며 제 삶에 지어진 매듭 하나씩을 풀고 싶었습니다.”

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도신 스님은 석사 논문으로 ‘한국현대시연구-경허‧오현을 중심으로’를 썼다.(2021) 수행자의 깨달음과 선시의 연관성, 선어(禪語)의 풍미와 시적 표현 형식에 초점을 맞춰 경허‧오현 스님의 선시 창작 방법과 미학적 양상을 드러냈다. 선에 대한 도신 스님의 혜안과 깊이를 엿볼 수 있는 논문이다. ‘웃는 연습’에 이은 두 번째 시집에서는 ‘선기’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학교 정규 과정은 언제 마쳤던 것일까? 법주사 승가대학의 4년 과정도 마치지 않고 상경한 후에는 작사‧작곡‧노래에 매진하지 않았던가? 

“2013년부터 중‧고등 검정고시를 준비한 후 2015년 신성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습니다. 글 쓰는 게 좋아 2019년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중고등 검정고시에서 대학원 졸업까지 8년 걸린 셈이다. 뒤늦게 학구열에 불타오른 연유가 있을 것이다.

“1978년 겨울로 기억합니다. 법주사 승가대학에서 뛰쳐나온 저를 은사 스님이 수덕사로 부르셨습니다. ‘강원(법주사 승가대학)은 내 의지로 보내졌다. 그러나 입학한 이상 너는 교학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세웠어야 했다. 그리했다면 너는 강원에서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바른 의지를 낸 주인공은 결코 도망 다니는 생을 이어가지 않는다. 도망 다니는 사람 되지 마라!’ 고백하건대 그 소참법문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의지와 실천의 이반 된 삶의 연속에 가슴 한구석은 늘 허전하고 시렸다. 

은사 스님의 당부를 올곧이 따른 것 하나를 꼽으라면 서광사 불사다. 법장 스님은 전국을 누비며 노래하던 제자를 불러 “호서지역의 중심포교당으로 키워보라 명했다.(2001) 절에서만 살다시피 해야 할 주지 소임이 고역이었을 터임에도 묵묵히 불사에 전념하더니 연건평 400평의 3층 법당 기공식을 개최했다.(2005)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법장 스님은 제자가 이뤄낸 성과를 보며 흐뭇해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게송 하나 남기고 입적에 들었다.

‘나에게 바랑 하나 있는데, 입도 없고 밑도 없다./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총무원장 소임을 보던 때의 큰스님은 제가 8살 때 뵌 큰스님과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자비가 충만하신 스님 그대로였습니다. 그 무엇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수덕사, 문중, 종단의 일 모두 공심으로 처리하셨습니다.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 바다보다 넓은 품으로 사람을 안았습니다. 그러기에 늘 당당하셨습니다.”

서광사 3층 법당.
서광사 3층 법당.

서광사 3층 법당은 2008년 준공됐다. 이후에도 서광사 불사는 계속 진행됐고 마침내 ‘호서지역의 중심포교당’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허전했다. 무엇일까? 뇌리를 떠나지 않던 ‘그 일언’이 온몸을 흔들어 깨웠다.

“도망가지 마라!”

그 지중한 소참법문을 들은 지 35년 만에 ‘바른 의지’를 세워 석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이제 곧 있으면 수필집 ‘내가 웃자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가 출간된다.

“태어나 보니 어두운 터널 안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터널에서 빠져나오고야 알았습니다. 터널 밖에서 웃는 연습을 많이 하고 다시 터널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 안에서 제가 환하게 웃으면 별 하나 뜰 것입니다. 자신 안에 행복의 실상이 모두 구족 돼 있음을 알게 된 누군가가 맑은 별 하나를 또 띄울 겁니다. 얼마 후엔 터널 안의 별들이 모이고 모여 은하수로 흐를 겁니다.”

경허‧만공 스님의 선기가 충만한 수덕사이지만 우리나라 33관음성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도신 스님도 출가 직후부터 관음 기도 정진을 해 왔다. 관음 기도 가피 일화를 청했다.

“환영이었겠지만 사실처럼 느껴졌습니다. 칼을 든 군인이 법당에 들어왔습니다. 기도하는 저는 쳐다보지도 않고 관세음보살님의 팔과 다리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님의 미소는 그대로였습니다. 화가 난 군인이 관세음보살님의 몸통까지 조각을 내었으나 미소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관세음보살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미소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물질적 세계에서 벗어 난 ‘관음 미소’는 우리 곁 곳곳에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에 가피는 분명 내려집니다.”

그 체험 후 도신 스님은 시집 등에 사인할 때 ‘관음 미소’를 그려 넣는다.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선‧경구’를 청하니 장엄염불의 한 대목을 전했다. 홍성 오소산 정암사에서 공부할 때 당시 주지 소임을 보던 달하우송(達河愚松‧현 수덕사 방장)으로부터 처음 들었는데 지금도 이 선시를 대하면 미소가 절로 인다고 한다.

‘천 길의 낚싯줄 곧게 내리니/ 하나의 파도 일어나메 온갖 파도 일어나네./ 밤 고요하고 물 차가워 고기 물지 않으나/ 배 가득 달빛 싣고 돌아온다.’
 

시집 ‘웃는 연습’
시집 ‘웃는 연습’

덕숭총림의 주지 소임을 맡았으니 어깨가 무거울 법하다. 

“사중의 어른 스님을 찾아 인사를 드리며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큰 절의 주지는 별거 아니다. 사실 종살이다!’ 뼈에 새겨 넣었습니다.”

‘단단한 의지’로 읽힌다. 아니, ‘바른 의지’를 세웠음이다. 늘 그렇듯, 수덕사의 봄은 찬연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신 스님
법장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8년 10월 수덕사에서 원담 스님을 계사로 수계했다. 조계종 16대 중앙종회의원, 재심호계위원, 초심호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수덕사 성보박물관장, 서산 서광사 주지, 조계종 초심호계원장을 맡아왔다.

[1678호 / 2023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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