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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봤다면 가장 의아해할 지구적 사건은

기자명 법보
  • 기고
  • 입력 2023.05.03 14:25
  • 수정 2023.05.03 14:28
  • 호수 1680
  • 댓글 0

[기고]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매일 수십 억 동물들 잔혹한 죽임 당하지만
어느 신문 헤드라인도 되지 못하는 게 현실
생명외경은 그 자체가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
대승 보살정신과 불교의 자비와도 깊게 연결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가 5월1일 ‘생명외경과 보살정신’ 제하의 기고를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고 대표는 지구온난화 비상협의회 대표와 식생활교육 부산 네트워크 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국제 채식연합회(IVU)를 대표해 세계 NGO대회와 유엔회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편집자

지혜와 자비, 아름다움 등은 붓다의 속성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속성의 하나는 힘이다. 붓다가 된다는 것은 천 백억 화신을 나투어 온갖 중생들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반야심경’이나 ‘금강경’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름 흥미진진하다. 흔히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핵심을 물으면 방하착이나 무집착, 무쟁 등을 꼽곤 한다. 그러나 방하착이나 무집착, 무쟁은 가르침의 핵심이기보다는 핵심의 효과이자 핵심에 따른 실천 자세에 가깝다. 그럼 핵심은 무엇인가.

사실 설법의 현장과 그 현장 전후를 보면, 경전의 내용과 함께 관자재보살이나 붓다의 힘과 가피가 사리자나 수보리 등 제자에게 자신들의 깨달음의 일부나 공성 체험을 이심전심 열어주는 자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두 경전을 쓴 불보살과 경전을 읽는 준비된 불자들과의 관계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비유컨대 대통령끼리의 정상회담과 같다. 스스로의 본성을 온전하게 깨쳐 대통령이 된 불보살들이 붓다의 주요 속성인 힘을 통해 단지 존재하는 ‘가만있음’ 그 자체로 중생들의 본성 즉 내면의 대통령을 불러 일깨워 공성과 반야의 일부를 깨닫게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 일대일로 법을 전하는 과정의 집단적 형태이자 원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불보살의 가피로 인한 이러한 공성과 반야 체험에 따른 초발심은 향후 보살행을 위해 어떠한 마음을 내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런 깨달음이 전제되기에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방하착이나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바도 인위적인 노력으로만 일관하던 이전과는 훨씬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육바라밀이나 팔정도는 물론 네 가지 상을 넘어서는 반야의 변증법도 수월하게 함이 없이 행해지면서 보살로서 성장하고 지혜와 깨달음도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장 속에서 슬픔과 죽음, 고통의 경험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보살은 시간 속의 또 다른 차원 즉 영원의 차원에서 중생을 돕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하는 사람이다. 예수도 신랑이 신부를 향해 오듯이 삶과 시간이라는 십자가로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원죄를 씻기 위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그리스도의 수난은 잘못된 해석이다. 예수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십자가 위에 눈을 뜬 채로 있는 그리스도는 자신들의 모습이다. 스스로 에고를 그런 십자가에 못박힘에 참가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불교의 보살 대승운동과 다를 바 없다. 실제 대승운동의 시기와 예수의 활동 시기는 겹쳐있을 뿐 아니라 실크로드를 고려하면 지리적 거리도 멀지 않다.

21세기에는 핵이나 양극화, 지구온난화처럼 국가나 민족 단위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 당면한 기후변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만 해도 현재까지 속수무책에다 향후 문제의 해결도 요원한 상태다. 기후변화의 예만 봐라. 온난화를 2℃ 이내로 억제하는 과정에서 GDP에 미치는 영향은 많이 봐야 2%다. 1.5℃로 억제하는 경우엔 2.9% 정도다. 인류가 2.9%의 비용을 부담하면 충분히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글로벌 편익이 글로벌 비용을 훨씬 넘어섬에도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전혀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정치나 글로벌 관리체계 나아가 개인 국가를 넘어서는 정체성의 형성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의 최대 도전은 공동의 비전 즉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못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세계대전으로 서구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했던 슈바이처의 입장과 비슷하다.

슈바이처는 문화의 파국은 이야기 즉 세계관의 파국이고 윤리의 결핍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문화에 대한 의지는 윤리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의식하는 보편적인 진보의지이다. 아무리 세계와 인생을 긍정하는 훌륭한 세계관이라도 문화의 창조는 그 세계관이 내면화되고 윤리화 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지식과 능력이 이룩한 업적이 대단해도 인류가 윤리적 목표로 나아가지 않으면 물질적 진보의 혜택은 물론, 거기에 수반되는 위험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문화재건을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생물학이나 물리학, 종교 등의 세계해석에 따라 규정되는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인간 의식의 가장 직접적 사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여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에서 사고할 것을 제안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주위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자신을 생명의지 한가운데 서 있는 생명의지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생명외경 즉 우리 자신을 규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체험하는 사람은 다른 생명의지도 자신의 생명의지와 같이 외경심을 갖고 대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비단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생명으로서 신성시하고 곤궁에 빠진 생명을 헌신적으로 도와줄 때만이 윤리적이다. 모든 생명체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체험하는 보편적 윤리만이 사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의 날 행사에 채식단체 회원들이 비건채식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채식문화원 제공
지구의 날 행사에 채식단체 회원들이 비건채식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채식문화원 제공

물론 우리는 먹는 것부터 하나의 생존은 다른 생존의 희생과 파괴 위에 존속돼야 하는 사바세계의 잔인한 법칙에 얽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로운 윤리적 존재로서 가능한 이러한 필연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마주하는 세계의 생명체의 파괴를 지양하고 자신의 인간성을 견지하며 다른 생존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를 애써야 한다. 생명외경은 고뇌에 차 있으면서 한편으론 신비스러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생명외경은 그 자체가 세계와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일 뿐 아니라 윤리이다. 나아가 윤리가 빈약한 신비주의와는 달리 윤리적 신비주의이다. 우리는 우리 영역에 들어오는 세계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의지 속에 체험하고 우리의 생명의지를 행동을 통해 무한한 생명의지에 내맡기게 된다.

만약 다른 행성의 우주인이 지구를 탐사한다면 오늘 이 시간 지구에서 벌어지는 가장 중대하고 인상적인 사건이 무엇이라 바라볼까? 하루 수십억의 동물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그로 인한 기후변화 팬데믹 생물다양성 기아 자원고갈 비만 등등 그 파괴적 영향이 뉴욕타임스나 어느 신문의 헤드라인이 결코 되지 못하는 현실에 의아해 할 것이다. 게다가 인간 먹이사슬의 정점에 둔 세계관과 뿌리 깊은 문화적 세뇌로 인한 육식습관의 무의식적 그림자가 우리의 사적 공적 영역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인간 동물 사회 등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유의미한 관계를 찾아내는 능력을 원천적으로 훼손하고 있다는데 놀랄 것이다.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모든 존재는 폭력 앞에 몸을 떤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사랑한다. 우리가 다른 존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본다면 어떻게 해를 가할 수 있겠는가’라는 부처님의 말씀도 그리고 ’둘이 아님‘의 정견을 토대로 한 오계의 가르침도, 육바라밀의 실천도 세계와 남의 생명의지를 자신의 생명 속에서 체험하는 생명외경의 심화이자 확대다. 그리고 생명외경의 보편적 윤리와 세계관은 살아있는 예수의 사랑의 윤리와 대승의 보살정신 및 불교의 자비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슈바이처가 생명외경과 그에 따른 실천으로 문화재건을 목 놓아 외치듯 되돌릴 수 없는 기후로 인해 파국으로 치달리며 아무런 대책마저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지구를 살리고 숱한 생명을 구하고자 무수한 보살들의 즐거운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지속가능한 생명과 평화의 문화이상에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1680호 / 2023년 5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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