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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이즈산(麥積山) 석굴

기자명 이재형
깎아지른 절벽에 새긴

민초들의 ‘눈물 서원’


<사진설명>시닝을 벗어나면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을 만날 수 있다.

톈수이(天水)에 접어들 무렵 시간은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시닝(西寧)의 하늘을 뒤로 하고 떠나 온 것은 새벽 5시 30분이었다. 일찍 출발한 덕에 우리는 오늘 마이즈산(麥積山) 석굴을 보고 시안(西安)으로 향할 수 있을 것 같다. 톈수이 지역에서 들어서면서부터 짙게 깔린 안개가 10시가 넘도록 걷히지 않는다. 라이트를 켜도 몇 십미터 앞도 분간하기 힘들다.

톈수이는 중국 전설상의 황제인 복희 씨의 고향이며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탓에 당나라 때는 이곳이 진주(秦州)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수많은 스님들이 이곳을 거쳐 서역으로 오갔으며 불굴의 의지를 지닌 현장 스님도 여기를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 마이즈산은 톈수이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시내를 벗어나니 아스팔트 대신 비포장도로다. 여기저기서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 분주하다. 2004년말께 완공되면 교통이 훨씬 나아질 거라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마이즈산으로 향하는 길은 풍경이 목가적이다. 오른편에는 집들과 낮은 야산이, 왼쪽 편으로 길게 뻗은 높은 산에 나무 한 그루 없이 온통 밭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도 간혹 눈에 보인다. 조금 더 가니 수십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다가가보니 여기저기서 상자나 포대 위에 채소와 과일 등을 올려놓고 팔고 있다.

<사진설명>마이즈산 123굴에 봉안된 보살상

그 분들의 모습이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과 닮아있다. 톈수이의 사과가 유명하다는 말에 몇 개 샀다. 부사만큼이나 새콤한 게 맛이 일품이다. 목공예점으로 보이는 한 가게 앞에는 사람 키 정도 됨직한 스님의 모습이 여러 구 서있다. 마이즈산의 가장 유명한 조각품 중 하나인 아난존자 상이다.

이곳 주민들이 가장 아끼는 석상은 아난 상과 을불황후(乙弗皇后) 상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닐 듯싶다. 미녀를 떠올릴 정도로 아름다운 아난 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을불왕후 상은 그 속에 담긴 애틋한 사연 때문에 더욱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출가해 자살한 비운의 여인 을불황후

을불황후는 16세에 서위 문제(文帝)의 황후가 된 여인이다. 12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정작 장성한 자식은 태자 한 명에 불과하다. 서위는 몽골계 유목민족으로 당시 유연족이 국경을 자주 침략하자 문제는 고민 끝에 정략결혼으로 그들의 침략을 저지키로 한다. 유연족도 이를 받아들여 유연 출신의 여인 도후(悼后)와 결혼하도록 하고 을불황후에게는 출가할 것을 황제에게 강요한다. 그에 따라 을불황후는 538년 마이즈산 석굴로 출가해 비구니 스님이 돼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황후는 문제와 을불황후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심했고 이를 문제 삼았다.

황제가 오해일 뿐이라고 해도 도후는 믿지 않았고 유연국은 다시 쳐들어왔다. 힘없는 황제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결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경우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깊은 산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황후는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사진설명>마이즈산 석굴은 실크로드 위의 수행도량이자 미술관이다. 절벽에 매달려 부처님을 새겨 갔을 옛 사람들의 신심에 감타이 절로 나온다.

이 때 을불황후의 나이가 31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을불황후는 비록 죽었지만 백성들은 을불황후의 아름다움과 자비스런 마음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 무도왕원술이 진주자사가 되었을 때 그를 도와 조성한 게 바로 43굴 불상이다. 그 불상에는 어머니를 잃은 안타까운 아들의 심정과 힘없는 백성들의 서러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차는 울퉁불퉁한 길을 고무 튀듯이 곡예를 하며 나아갔다. 그 때 멀리 보릿단을 쌓아올린 듯 산이 머리를 내민다. 마이즈산이다. 주변의 경관이 워낙 평범해 보여서인지 유독 마이즈산만 눈에 띈다. 이 산은 홍사암이 절벽을 이루면서 형성된 기묘한 산으로, 해발 1742미터지만 산맥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142미터 높이란다.

차가 마이즈산으로 다가갈수록 산은 더욱 웅장해 보인다. 아마도 거대한 깎아지른 절벽 때문일 듯하다. 우리는 표를 끊고 산에 올랐다. 암벽 전체에 나무사다리를 설치해 석굴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많고 많은 장소를 놓고 어떻게 이런 절벽에 굴을 파고 부처님을 모실 생각을 했을까. 그 옛날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이 곳에 굴을 팠을까. 의문이 끊이질 않는다.

대부분 자물쇠를 채워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 우리는 창살 틈으로 안을 들여봐야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희미한 햇살에 비친 석굴안 광경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이런 위태로운 곳에 세운 신심의 결정체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동굴은 모두 194개, 석상이 7000여 기로 중국에서 흙으로 만든 불상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석굴이 대단위로 조성된 시기는 주로 북위와 서위시대로 오똑한 코, 얇고 작은 입술에 풍만한 몸매가 특징이다. 보살들도 대부분 모두 높은 관에 갸름한 얼굴, 거기에 긴 치마 같은 옷을 입고 있다. 벽화의 규모도 어마어마해 둔황 다음으로 넓은 900평방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드디어 을불황후 상이 봉안돼 있는 43굴에 들렀다. 이곳도 여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문이 닫혀 들어갈 수는 없지만 미소 띤 단정하고 우아한 여성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1500여 년 전 이곳에 살았던 을불황후와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는 아들, 그리고 이 굴을 찾았을 수많은 참배객들의 모습이 마치 오래된 영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지독하게 불운했던 한 여인이 오히려 고통받는 수많은 중생들의 위안처가 됐던 것이다.

석상 7000여 기…벽화도 900㎡에 이르러

10여 층의 계단으로 된 따라 위로 올라갔다. 밑이 까마득한 게 현기증이 인다.
북주시대 종실 우문 씨의 후원 아래 이충신 대도독이 조성했다는 유명한 4굴의 상7불각과 9굴의 하칠불각도 주변 벽화와 어울려 대단히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94굴은 소조 3존불 불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주존은 의좌불이고 협시는 짧은 체구로 수나라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을 이어 통일 제국을 완성한 수나라는 불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특히 수문제는 스님 23만 명, 절 3792개소, 사경 13만2086권, 불상 조성 10만6580구, 수리불상 150만8490구에 이르는 대작불사를 행했던 것이다. 마이즈산 석굴도 이 때 크게 중창되는데 칙명에 의해 사리탑을 세우고 정염사(淨念寺)라는 사호를 받기도 했다. 우리는 이곳저곳 고개를 디밀어 안을 살펴보았다. 절벽 석굴의 신비로움에 감탄사만 나올 따름이다.

오늘 중 시안까지 가야 하는 빠듯한 일정에 서둘러 관람을 마쳤다. 절벽 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부처님의 미소가 한없이 자비롭다. 절벽에 매달려 부처님의 모습을 아로새겼을 그 옛날 장인들을 그려 본다. 종교란 무엇일까. 해묵은 질문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편안한 게 곧 행복은 아닐 듯싶다. 어쩌면 오히려 삶의 진실은 뼈저린 고통과 시련 속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문지식과 이를 전달하는 정보매체가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우리는 옛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을지언정 ‘진실’ 혹은 ‘진리’에 더 가깝다고는 감히 말할 수는 없으리라.


<사진설명>마이즈산으로 가는길은 현재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그 길은 때로 장터가 되기도 한다.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았을 수많은 중생들. 마이즈산은 그들의 뼈와 눈물을 품고 있는 대지가 부처님께 바치는 거룩한 공양물이다. 달리는 차 뒤로 마이즈산이 신장처럼 꿋꿋하게 서있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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