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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여섯 늦깎이 화가 최혜자 보살

  • 인터뷰
  • 입력 2023.05.24 15:44
  • 호수 1682
  • 댓글 2

곡절 많은 인생 돌고 돌아 붓으로 펼쳐낸 환희로운 마음공부

6월16일까지 삼성노블카운티 리빙프라자서 ‘백발의 파티’
깨어있는 삶 위한 마음공부 의미 후배세대와 나누는 자리
늦은 나이 불연 맺은 후 글·그림으로 불법 전하는 데 매진

죽림형 최혜자 작가가 경전공부와 마음공부의 환희심을 붓으로 옮긴 작품을 6월16일까지 용인 삼성노블카운티 리빙프라자에서 전시한다.
죽림형 최혜자 작가가 경전공부와 마음공부의 환희심을 붓으로 옮긴 작품을 6월16일까지 용인 삼성노블카운티 리빙프라자에서 전시한다.

글과 그림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죽림형 최혜자 작가가 네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용인 삼성노블카운티 리빙프라자 4층 연회장에서 5월17일 개막한 전시 주제는 ‘백발의 파티’다. 말 그대로 여든여섯 백발의 삶을 자축하는 잔치이자 후배세대와 삶의 지혜를 나누는 연회의 자리다. 5년 만에 갖는 이번 전시에는 기존에 소개됐던 40여 작품에 새롭게 조성한 8개 작품을 더해 50여점을 선보인다. 소재는 ‘연꽃’ ‘법륜’ ‘부처님’ ‘수인’ 등 경전공부를 하다 마음공부를 하다 환희심이 차오르면 그 마음을 붓으로 옮긴 작품들이다. 특히 신작 8점은 캔버스가 아닌 전통한지를 사용했으며,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덧칠하는 작업으로 한지 특유의 질감을 살려낸 것이 특징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훈련입니다. 스스로 닦고 익혀서 열린 삶을 이루려는 것이고,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겪어본 실제 경험과 현상들을 통해 지혜가 깊어져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해가는 길이란 결국 깨어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저에게 그림은 깨어 있는 삶을 위한 마음공부의 일환입니다.”

최 작가는 불화를 그리고 4권의 불서를 펴낼 만큼 신심 깊은 불자다. 그러나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건 그의 여든여섯 인생에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 법을 만나기 이전 그는 매일 아침 아들의 등굣길을 함께하며 주기도문을 외우고, 하루도 빠짐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렸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생의 전반기, 교회는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쥐 죽은 듯 숨죽여 살아야 했다. 지독한 가난에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연좌제와 사회에 만연했던 남녀차별로 제대로 꿈을 펼쳐보지 못했다. 설상가상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지자 더욱더 성경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연결고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삶에 부처님과의 인연은 우연처럼 찾아와 필연처럼 맺어졌다. 1973년 어머니의 유언 같은 당부에 따라 태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미국인 변호사가 운영하는 국제법률사무소에서 매니저로 일하며 처음으로 안정된 삶이라는 걸 경험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죽음을 생각해야 할 만큼 큰 병이 찾아온 것이다. 병으로 일을 할 수 없으니 생활은 날로 궁핍해졌고,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들이 있었기에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절망 속 그가 선택한 것은 태국어 공부였다. 치료를 받든, 도움을 청하든 태국에서 살기 위해선 말부터 익혀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병석에 누워 눈 뜰 힘만 있으면 책부터 펼쳤다. 채 1년이 되지 않아 불편 없이 현지인들과 태국어로 대화할 수준에 이르렀다. 살기 위해 한국의 뉴스를 태국어로 번역해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병마는 여전했지만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고자 버둥거렸다.

그러던 중 함께 대본을 쓰고 번역한 태국영화 ‘아리랑’이 현지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태국작가협회의 정식 회원이 됐다. 이후 그를 찾는 사람도 늘어났다. 1984년 어느 날 태국 왕실에서 한 통의 문서가 전달됐다. 왕세녀 마하짜끄릳시린톤 공주의 ‘법구경’ 해설 시집 ‘불교격언에 따른 시’를 번역해 출판하라는 국왕의 허가서였다. 왕정국가인 태국에서 국왕의 허가서를 받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연꽃’ ‘법륜’ ‘부처님’ ’수인’을 소재로 작업한 최혜자 작가의 작품들.

국왕의 허가서는 태국작가협회 원로들의 추천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불교에 대해, 부처님에 대해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로 하여금 불교에 대해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때까지도 그는 기독교 테두리 안에서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 불교에 대한 지식은 부처님을 석가모니라 하고, 인도 어느 조그마한 나라의 왕자 출신이라는 게 전부였다.

“내 종교가 아니라고 함부로 글을 옮기는 무례를 범할 순 없잖아요. 양심이 허락하질 않았어요. 며칠을 고민하다 열린 마음으로 불교공부를 시작했죠.”

한국대사관을 찾아 불교 관련 서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대사관이 소장한 유일한 불서인 동국대 편찬 ‘불교성전’을 손에 넣었다. 마음을 다잡고 인쇄된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 채 몇 장을 넘기지 않았는데 이미 가슴에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가득 차올랐다. 50년 가까이 하나님께 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쁨과 환희심으로 책장을 넘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마주했다. 

1985년 ‘불교격언에 따른 시’가 세상에 나왔다. 국왕의 명으로 왕세녀의 책을 번역해 출판했다는 것만으로 방송과 신문, 잡지에 연일 소개되며 졸지에 유명인사가 됐다. 그렇게 생의 후반기, 불교는 시나브로 삶의 중심이 됐다. 언제부터인가 삶을 비관하며 구하고 매달리기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의 방편으로 삼았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삶의 희망을, 현실에 대한 긍정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철저한 자기 주체성을, 세상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집착과 분노를 떨쳐버린 마음의 평온을 찾고자 매진했다.

태국에서의 성취 몇 년 뒤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아들의 대학 진학을 위한 결정이었다. 낯설고 물선 나라로 이사를 했지만 앓고 누워 지내면서도 불교공부는 계속 이어갔다. 꿈을 꾸어도 부처님 꿈을 꿀 정도로 온 마음을 기울여 공부에 매진했다. 공부의 시간이 더해지면서 교류하는 스님들도 여럿 생겼다. 특히 ‘불교격언에 따른 시’ 덕에 맑고향기롭게 회주 법정 스님과도 사이가 각별했다. 

그림을 시작한 것도 파리다. 2000년을 앞둔 어느 가을날 두 눈을 수술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운이 나쁘면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마취를 하고 누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상황에서 갑자기 연꽃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이라고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미술수업이 전부였다. 색깔을 넣어 그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붓글씨를 써본 경험을 되살려 먹으로 그리는 그림을 상상했다. 퇴원 후 눈을 반쯤 찌그러뜨리고는 종이와 붓을 찾아 정성을 다해 연꽃을 그렸다. 옆에서 좋다고 칭찬을 해주는 서양 친구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 유화물감을 샀다. 그런데 이 물감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르침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간절히 무엇을 그리고 싶었다. 캔버스 두 장을 펼쳐놓고 잘 알지도 못하는 유화물감을 열어 무작정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의 부처님이 나타났다. 한 분은 눈을 살짝 뜬 모습으로, 다른 한 분은 눈을 지그시 감은 모습으로 조용한 미소와 평화스러움이 자연스러웠다. 

이후 경전을 읽다가 마음공부를 하다가 기쁨이 가득 차오르면 그 기쁨으로 붓을 잡고 부처님의 미소를 따라갔다. 공부와 그림 사이에서 매일 몇시간을 보내면 충만함에 빠져 아픈 사람 같지 않게 평화스러움을 유지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부처님의 고요한 미소와 편안함을 따르는 과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예수의 어린양’으로 살아가는 아들이 부탁을 해왔다. “어머니가 하는 공부가 꽤 괜찮은 공부인 것 같다”며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변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나이가 더 들면 그 공부를 해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장은 이해하지 못해도 훗날 이해하고 따라할 수 있게 기록으로 남겨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고, 하지 않으면 아들은 평생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쓸 수 있을지 암담했다. 처음부터 새로 불교공부를 시작했고, 12년째 접어든 2014년 ‘아들에게 남기는 어머니의 마음공부’가 출판됐다. 1년 뒤 미처 엮지 못한 원고와 새롭게 탈고한 글을 모아 육체적·정신적·마음적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한 ‘아픔을 다스리는 마음공부’를 펴냈다. 이어 아들에게 남기는 두 번째 이야기 ‘아름답게 늙어가는 지혜’, 마음으로 그린 그림과 마음공부의 단상을 엮어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를 잇따라 출간했다. 이 가운데 ‘아들에게 남기는 어머니의 마음공부’는 올해의 불서에, ‘아픔을 다스리는 마음공부’는 세종우수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8년 한국에 돌아왔다. 여전히 경전을 읽고, 마음공부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후 나는 세상사를 거의 잊어버리고, 환자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오직 공부에만 푹 빠져 지냈어요. 매일 눈뜨면 부처님 그리고, 공부해가는 글을 쓰고, 지치면 한잠 자고, 깨어나면 또 공부하고, 그렇게 외롭다고 아프다고 푸념할 새 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환갑을 맞이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공부하는 이 정신이 있어서인 게 분명해요. 지금껏 나를 지탱해준,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함께해줄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마음공부의 환희심을 붓으로 옮긴 죽림형 최혜자 작가의 작품은 6월16일까지 만날 수 있다. 

용인=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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