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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도시의종교] 1. 도시와 함께한 불교의 흥망성쇠

불교는 세속적 삶 벗어났지만 도시와 성쇠 함께한 ‘도시종교’

도시 세속적 삶에 물들지 않는 적정 거리 유지하며 발전
무역으로 부 축적했던 신흥계급 주역들 불교운동에 동참
지계와 수행에 더 민감해지려는 출가자 의식 필요한 시대

도시의 성장과 함께 발전했던 불교는 6~7세기 농촌공동체와 바라문 협력이 공고해지고 도시가 쇠퇴하면서 불교 또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법보신문 DB]
도시의 성장과 함께 발전했던 불교는 6~7세기 농촌공동체와 바라문 협력이 공고해지고 도시가 쇠퇴하면서 불교 또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법보신문 DB]

인도문명사의 미스터리는 여러 가지를 손꼽을 수 있겠지만, 도시의 등장에 관한 의문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대략 기원전 1500년경 인더스 문명기의 여러 도시가 사라져버린 이후, 도시의 흔적은 뒤이어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인도의 역사 속에 도시들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천년이 흐른 뒤이기 때문이다. 그 비어버린 천년을 우리는 여전히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기원전 500년 혹은 600년경 전후 불교가 등장할 무렵에야 수십여개 도시의 흔적들이 역사적 유물과 문헌을 통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의 신흥종교였던 불교와 도시들의 새로운 출현은 과연 우연일까.

우리는 불교나 자이나교와 같이 사문의 종교들이 등장할 무렵, 인도 북부의 갠지스강 평야지대와 남부 데칸고원 등지에서 새로운 도시들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인도 북부에만 대략 20여개의 도시들이 등장한다. 이 도시들은 철기를 사용해 효과적으로 농업 생산력을 증대했고 잉여노동과 자본을 토대로 번성했다. 인도 남부에는 서쪽 해안에 인접한 도시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 도시들은 장거리 해상무역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에 의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몇 도시들을 열거하면 코삼비, 웃자인, 라즈기리, 바라나시, 참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도시들은 대부분 왕실이나 행정 관청을 중심으로 성읍(城邑)화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대에 그 성읍의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된 형태를 띤다.

한편 이들 도시 내외 주변에는 크게 두 부류의 종교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하나는 초기 힌두교 또는 바라문교(婆羅門敎)라 부르는 종교이며, 또 하나는 불교나 자이나교와 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신흥 사문(沙門)의 종교들이었다. 하지만 이 두 부류의 종교는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 매우 확연히 구별되는 존재방식을 가졌다. 간단히 말하면, 바라문교는 도시 ‘내부’에 기거하는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필요시 왕과 귀족들 또는 주민들이 요청하는 제사를 주관하고 집행해주는 종교기능인들의 집합체였다. 도시에 사는 사회기능인의 한 계층을 담당하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사회적 부의 축적, 가족의 구성과 생계, 성생활 유지는 당연한 것이었으며, 심지어 분노와 질투 같은 개인의 심리적 발산도 크게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반면, 불교나 자이나교의 수행자는 생존과 욕망으로 점철된 일체의 도시적 삶에서 벗어나 도시의 ‘외부’ 또는 ‘변두리’에 기거하면서 전형적인 고행자의 모습, ‘세상을 포기한’ 금욕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시 내에서 각종 종교 서비스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바라문교의 사제들은 불교나 자이나교도가 당면한 문제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즉, 생존의 문제였다. 불교나 자이나교는 그 태생부터 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종교였다. 도시와 도시민에게 생계를 의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었던 종교였다. 생존을 시민에게 의지해야 했지만, 결코 도시적 삶을 가까이하거나 거기에 물들어서는 안 되는 사문들의 역설이 여기서 등장한다. 불교는 태생적으로 도시의 세속적 삶에서 탈출한 종교이지만 도시와 떨어져서 생존할 수 없는 종교다. 이처럼 도시와 불교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불교의 흥망성쇠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불교는 후원자에 의해서 발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 도시 내의 불교 후원자가 누구이며 그 후원자 규모의 추이에 따라 불교 교단의 흥망이 결정된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사문의 운명이다.

이로 인해서 불교와 도시의 관계는 멀어서도 안 되고 가까워도 안 되는 ‘적절한 윤리적 거리’가 필요했다. 이 적절한 거리가 어떠한 것인가는 인도에 잔존하는 고대 불교 사원지를 답사해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죽림정사는 빔비사라왕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빔비사라왕이 지은 죽림정사의 위치는 성곽도시 라자그리하의 외곽에 존재한다.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는 두 겹의 산맥 사이에 위치해서 자연적인 방호기능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분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주변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고 수도의 경계를 만들었는데, 대략 3~4미터 높이의 산성 흔적이 남아있다. 이 초기 도시 경계 외각 산허리에는 크고 작은 불교의 사원과 유적들이 펼쳐져 있다.

그렇지만 죽림정사의 역사적 실재에 아직도 의문이 많이 남기 때문에, 간다라 지역에 남아있는 사원지가 도시와 사원의 관계를 가늠하기에 훨씬 적합하다. 예를 들어, 비교적 초기의 불교승원형태를 잘 보여주는 기원후 1~2세기경에 건립된 사원들의 형태는 예외없이 세속의 도시 또는 읍성과 일정한 관계를 상상하게 해준다. 탁트히 바히나, 모흐라 무라두 등과 같은 사원지는 도심에서 도보로 대략 20여분 내외에 위치한 곳의 숲이나 구릉에 위치해있다. 이같이 규모있는 사원들의 인근에는 성벽으로 둘러싼 고대 도시의 흔적들이 존재한다. 이는 도시와 불교의 상호의존 관계가 얼마나 긴밀했는가를 말해준다.

당시 도시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상업을 중심으로한 도시의 성읍과 농업에 기초한 촌락공동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처음부터 성읍 내부에 농토와 촌락이 공존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초기 도시를 뜻하는 ‘뿌라(pura)’ 혹은 ‘두르가(durga)’는 성벽이 존재한다. 이 성벽은 아마도 왕실이나 행정기관, 그리고 가축 및 상공업자의 거주지를 보호하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더 확장되어 나가라(nagara)로 발전한다. 따라서 도시가 발전하면서 성읍의 외벽은 여러 겹으로 확장될 수 있다. 라자그리하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도시의 성읍 내에는 권력과 부를 운영하는 자들이 있었고, 불교수행자들은 탁발을 위해 수시로 이 성읍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불교수행자들이 도시 내 신흥상공업자들의 후원을 받거나 이들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은 꽤나 높다. 또한 도시의 상업을 통해 여러 지역을 이동했던 상인·지식인 계층의 후원도 있었을 것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도 도시민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샬리, 슈라바스티, 바라나시, 카필라바스투, 파탈리뿌뜨라 등에서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도시 상인이 주축이었을 것이다.

이 도시들은 대부분 교통로에 자리 잡고 있었고 교통로는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도시의 발전과 이 도시에서 살고 있었던 장자들의 보시가 불교발전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경제를 일으켰던 신흥계급의 주역들이 불교와 같은 새로운 종교운동에 동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전에 그려진 바와 같이, 꼬삼비에는 당시의 대표적인 사원들이 모여 있었다. 예를 들어 그 도시의 유명한 장자들의 이름을 딴 꾹꾸따 사원이나 고시따 사원 등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교통로 위에 놓여진 쁘라야그와 파탈리뿌뜨라도 중요한 불교중심지였으며, 이 도시에서 불교가 흥성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새로운 경제세력으로 등장하는 상인들이나 다양한 지식을 접하게 되었을 도시 지식인들에게 과거 바라문들이 주도하던 주술과 종교의례는 더 이상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라문교에 상반되는 새로운 종교로서 등장한 지 천년이 흐른 후 불교는 다시 서서히 침체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락한 원인을 우리가 여러 관점에서 짚어낼 수 있겠지만, 불교수행자들이 지척에 두고 의지했던 도시의 쇠락과도 관계가 있다.  

6, 7세기경 굽타 시대를 지나면서 중앙집권적인 통치형태가 붕괴되고 지방 봉건세력이 비등해진다. 대체로 국가의 수도로서 기능했던 도시의 위상은 점차 그 중요성을 잃게 된다. 반면 지역의 토호세력이 소유한 농토와, 바라문들에게 하사된 농토가 활용가치가 높아지면서 농촌공동체와 바라문의 협력은 더 견고해지게 된다.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불교는 점차 그 후원자를 상실하게 되면서 교세가 후퇴하게 된다. 

도시의 후원이 줄어들게 되면서 불교가 선택한 변화는 불교수행자들이 힌두교 사제의 역할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즉 왕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거나, 또는 일반 대중들의 길흉화복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실질적 사제의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이 유사한 역할을 놓고 벌어진 경쟁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점차 힌두화 되어가거나, 교세가 위축되는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힌두교와 불교의 유사한 역할 분담, 그로 말미암은 개종의 불필요성,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의 축소가 악순환처럼 이어졌을 것이다. 6~7세기 인도에서 불교의 중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심재관 교수
심재관 교수

불교는 도시의 세속적 삶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발전해왔고, 현대의 불교도 도시를 떠날 수 없다. 통신망과 교통의 발달로 인해 출가자도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세속 도시의 삶에 밀착될 수밖에 밖에 없다. 이때 초기불교의 사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속적 도시에 대한 심리적 긴장감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불교와 도시의 상징적 거리를 말이다. 그것은 청정한 지계와 수행정진에 더 민감해지려는 출가자의 의식을 필요로 한다.

심재관 상지대 교수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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