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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일까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한밤중에 날 부르는 이 누구인가

발소리 죽이며 지리산까지 찾아와

방문을 두드리는 이 누구인가

눈 비비며 툇마루에 나가보면

아무도 없네 대숲에 달빛만 찰랑이네

안개 속에서 날 부르는 이 누구인가

한숨 쉬며 섬진강까지 따라와

새벽잠을 깨우는 이 누구인가

알몸으로 강변에 나가보니

아무도 없네 여울의 은어떼만 솟구치네

밤낮없이 날 부르는 이 누구인가

예까지 찾아와 날 깨우는 이 누구인가

눈감아도 푸르디 푸른 지붕 위의 감나무

투둑, 툭 섣부른 땡감들만 떨어지네

제 몸무게도 못 이겨 스러지는 청춘들이여

모두 잊고 고이고이 잠드시라



졸시 '날 부르는 이 누구인가' 전문



때아닌 장마가 길어지자 자주 땡감들이 떨어진다. 밤마다 황급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마당에 나가보면 아무도 없다. 슬레이트 지붕을 후려치며 투둑 툭 떨어지는 땡감들이 나를 깨운 것이었다. 떨어진 땡감을 손에 들고 바라보니 그 푸른 빛 속에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참으로 떫은 세상을 못 견디고 스러져간 젊은 벗들과 불의의 사고로 먼 길을 떠난 불귀의 객들….

죽음이란 무엇일까. 액체의 전생에서 고체의 이승으로, 그리고 기체의 저승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처음엔 물이었다가 나무로 자라 마침내 향기로 남는 일이 아닐까. 때 이른 죽음들을 두고 나는 떫디 떫은 땡감들이 삭아 마침내 감식초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며칠 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먼길을 떠난 화개골 산록차의 박선생도 그러하리라. 떫디 떫은 세상에 온몸으로 떫은 땡감이 되어 살다가 홀연히 감식초의 길을 가고 말았다. 살아서 험했던 날들도 이제는 살아남은 이의 기억 속에 감물처럼 지워지지 않는 슬픔으로 존재할 뿐이다.

영안실에서 어린 막내아들 균이가 울면서 하는 말이 내내 가슴을 친다. "그런데 아저씨 왜 죽었다고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해요. 아빠하고는 아직 10년밖에 같이 살지 못했어요." 문득 말문이 막혀 균이를 꼭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불타는 집이요, 오늘 새벽에도 땡감 떨어지는 소리가 나를 깨운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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