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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명종대 불교중흥의 의미

기자명 민순의

풍부한 인프라 지원 속 엘리트 스님 육성시대

왕실 인사들과 개별 인연 맺으며 전국적으로 늘어난 내원당
개인 자금 희사·재유입 이어지며 불교·왕실 관계 지속적 강화
원활한 운영 위해 물적·인적 보충받으며 도첩제 발급도 재개

보물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아들인 명종의 만수무강과 후손 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했다. [문화재청]
보물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아들인 명종의 만수무강과 후손 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했다. [문화재청]

1545년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인종의 이복동생이자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의 아들인 명종이 즉위한 것이다. 당시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성인이 될 때까지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바로 이 문정왕후에 의해 허응당 보우(1509~1565) 스님이 중용돼 불교중흥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 시기 불교정책과 관련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내원당(內願堂)의 존재다. 명종 5년(1550) 사간원에서 “중앙과 지방의 큰 절로 내원당이라 지칭되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 수가 많게는 79곳이나 된다”며 이에 대한 시정을 요청하자, 임금은 여러 도에 있는 것을 합산해 수가 많은 것 같다면서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이전대로 수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명종실록』 10권, 5년 3월 11일.)

원당(願堂)이란 개인 또는 일족이 소원이나 조상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사찰이다. 그 중에서도 왕실의 기도사찰로 궁궐 안에 세워진 원당을 내원당이라고 했는데(『태종실록』 24권, 12년 7월 29일), 조선에서는 국초 창덕궁 내 문소전 옆에 있었다(『세종실록』 81권, 20년 6월 26일). 이후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중종 때까지 공식적인 재정 지원도 받았다(『중종실록』 1권, 1년 10월 25일).

그렇다면 내원당이란 궁궐 내의 법당 한 곳, 설령 여러 채가 지어졌다 한들 손가락에 꼽을 정도여야 하는데, 명종 5년의 기사는 그 개념과 수에서 파격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중종 34년(1539) 검토관(檢討官) 임형수(林亨秀)라는 이의 언급을 참고할만하다. 이날 그는 “신은 젊어서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승려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 사찰은 아무 전(殿)의 원당이고 아무 사찰은 아무 왕자, 아무 공주, 아무 옹주의 원당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공공연히 언찰(諺札)에다 아무 전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진기스러운 물품을 보고 출처를 물으면, 아무 전께서 보내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중종실록』 91권, 34년 6월 4일)라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 발언은 16세기 전반 전국의 많은 사찰이 왕실의 여러 인사들과 개별적인 인연을 맺으며 그들의 개인 원당으로 기능하였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 절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원당일 뿐 국가로부터 사사전(寺社田)을 지급받은 공식 사찰은 아니었으나, 중종 초 도첩, 승과, 기신재의 폐지 등으로 국가의 승정(僧正) 제도가 거의 와해되다시피 한 이후에도 불교계는 개인 시주에 의해 규모 있는 존속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명종 5년에 보이는 ‘전국 내원당 79곳’이라는 것은 바로 그 왕실 인사들의 개인 원당들을 아울러 왕실의 내원당으로 간주하는 인식 또는 정책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을 아닐까? ‘내(內)’라는 글자를 ‘궁궐 내부’라고 하는 공간적인 의미가 아닌 ‘왕실의 것’이라는 범주상의 의미로 새기며, 왕실 내원당의 규모를 전국적으로 확장하여 불교와 왕실과의 관계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여하튼 이후 내원당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하여 명종 9년(1554)에는 300~400에 이른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명종실록』 16권, 9년 5월 19일). 이들 사찰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가문 구성원들의 안녕을 비는 여러 불사와 불공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명종실록』 13권, 7년 7월 10일).

전국 단위로 확대된 이 ‘새로운’ 내원당의 수호를 내수사에 지시하였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내수사는 국고와 구분되는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부서이다. 따라서 내수사가 왕실의 기도처인 내원당과 재정적으로 밀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때때로 왕실 인사나 내외인척들의 개인 자금이 희사되기도 했다(『명종실록』 13권, 7년 7월 10일). 이러한 사적 보시를 통해 전국의 이른바 내원당들은 그 규모와 활동을 유지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 내원당의 보시금이 다시 내수사로 유입됨으로써 왕실과 내원당의 밀착이 더욱 공고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처럼 늘어난 내원당들을 운영하려면 그에 상응한 인력이 필요했을 터. 도첩과 승과의 부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러한 승정을 도맡을 기관 즉 양종도회소의 복설이 요구됐다.

명종 5년 12월 문정왕후 본인이 직접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양종도회소의 복설을 지시했다. “대체로 승도들 중에 통솔하는 이가 없으면 금단하기가 어렵다. 조종조의 『경국대전』에 선종과 교종을 설립해 놓은 것은…근래에 혁파했기 때문에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됐다.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 ‘경국대전’에 따라 ‘대선취재조(大禪取才條)’ 및 승려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밝혀 거행하라.”(『명종실록』 10권, 5년 12월 15일.)

인용문의 생략된 부분에서 승려의 증가와 군액의 감소를 막고자 함이라고 하였지만, “승도들 중에 통솔하는 이가 없으면 금단하기가 어렵다”는 말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엘리트 승려의 양성이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우(普雨) 스님이 봉은사 주지로서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 都大禪師)에, 수진(守眞) 스님이 봉선사 주지로서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 都大師)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11권, 6년 6월 25일.) 

그리고 명종 7년(1552) 8월 드디어 중종 11년(1516) 이후 폐지되어 있던 도첩의 발급이 재개되었다. 시경(試經)한 스님 중 이상이 없거나 약간의 착오가 있는 인원 462명에게 발급된 것이었다(『명종실록』 13권, 7년 8월 17일). 이듬해 1월에는 양종의 시경승(試經僧) 2600명 중 전라도 교종승 20명을 제외한 2580명에게 도첩이 발급되었다(『명종실록』 14권, 8년 1월 19일). 한편 명종 7년 4월 봉은사와 봉선사에서 승과를 시행하여 선종과 교종에서 각각 21명과 12명이 선발되었다(『명종실록』 13권, 7년 4월 12일). 이후로도 3년마다 있는 식년시(式年試)에 승과가 시행되었으며, 훗날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 된 청허 휴정(淸虛休靜) 스님이 이 시기에 입격한 것 또한 유명한 일화다.

이렇듯 명종 대의 불교중흥은 내원당의 전국적인 확대와 엘리트 스님의 육성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며, 문정왕후에 의해 물적 인적 인프라를 보충 받은 조선의 불교는 이제 다가오는 다음 시대를 기다리게 되었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84호 / 2023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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