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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산 적석사 주지 제민 스님

“기도, 목숨 바치는 ‘지극함’ 담아야 부처님 가피 내립니다!” 

대기업 사직‧베트남 사업 
2년 만에 파산하고 은거

알코올 중독‧자살 충동
1만배로 극복하고 입산

21일 묵언‧금식 정진 후
법전 스님과 은사 인연

2km의 산길 삼보일배 
쇠락한 등운암 ‘중창’

태화산 순례 때 ‘물집’
‘안이했던 자신 참회’

쉬지 않고 물 안 마시며
매일 30km 3년간 걸어 

상월결사 인도 순례길서
전법 중대성 새삼 절감

“촌각을 아껴 진력해라” 
은사 말씀 평생 ‘명심’ 

 

적석사 주지 제민 스님은 “고요 속의 고독이 때로는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 축적된다”라며 “산사에서 홀로 바람과 꽃을 벗 삼아 지내보시라” 권했다.
적석사 주지 제민 스님은 “고요 속의 고독이 때로는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 축적된다”라며 “산사에서 홀로 바람과 꽃을 벗 삼아 지내보시라” 권했다.

강화 8경의 으뜸은 적석사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일몰, ‘적석낙조(積石落照)’다. 길, 산, 섬, 호수, 바다. 그리고 논·밭 사이로 난 길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 떨어진 붉은 노을이 빚어내는 풍광은 장관이다. 해수관음상 이마에 붉은빛이 감돌면 기도하던 사람은 자연스레 뒤돌아 이 절경을 마주하는데 그 찰나 서방정토를 꿈꾼다. 불자뿐인가. 절길 따라 고려산에 오른 사람 모두 노을 속에 자신을 맡긴 채 숨을 고른다. 세파에 요동친 마음을 쉬게 하려는 거다. 왜일까? 적석사 주지 제민(濟民) 스님은 “평온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제민 스님도 저 노을 속에서 깊은 평온을 얻었더랬다.

적석사 낙조대의 해수관음상.
적석사 낙조대의 해수관음상.

대기업의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중 사업을 하려 바다를 건넜다.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기 직전이었는데, 자유시장 경제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베트남인들에게 무엇인가를 판다는 것 자체가 녹록하지 않았던 때다. 2년 만에 파산하고 새벽녘의 김포 공항에 홀로 내렸다. 가족, 친구 그 누구에게도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서울 북한산의 절 아래에 허름한 월세방을 얻었다. 공사장에서의 막노동으로 번 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는데 자괴감을 채우려 마신 술은 날이 갈수록 늘어 심한 중독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피폐해진 자신을 볼 때마다 일어나는 자살 충동은 가까스로라도 누르고 있었다. 

맑은 공기 마신다고 나선 길이 절에 닿았다. 도량에서 만난 한 신도가 친절하게 대해주어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 날 그 신도가 떡과 ‘법요집’ 한 권을 건네며 말했다. 

“아직 시퍼렇게 젊은 사람이 허구한 날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어요? 1만배를 하면 모든 소원이 이뤄질 겁니다.”

백중기도 입재를 앞둔 무더운 여름날 부처님 앞에 섰다. 100배를 지나 500배에 이르니 다리 힘이 풀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삼천배 정진을 모두 마친 불자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초심자의 1만배를 지켜보며 격려했다.

“쉬면 안 돼요. 더 힘들어요,” “7000배를 하셨어요. 우리 거사님 약골인 줄 알았는데 대단하십니다.” “마음이 있으면 몸도 따라갑니다.” 

9000배에 이르니 일어설 수 없었다. 머리도 혼미했다. 이대로 가면 죽음에 이를 듯싶었다.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한 어른이 일렀다.

“이제 절하지 말고 합장한 채로 고개만 숙이시게. 마음이 지극하면 그 또한 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네.”

온 힘을 다해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흘렀다. 힘이들어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마지막 108배는 어르신의 조언대로 합장한 채의 반 배를 올렸다. 

이후 포천 수원산의 한 작은 절로 들어가 5년 가까이 머문 후 30대 중반의 나이에 계룡산 신원사 산문을 열고 삭발염의했다. 은사는 당시 신원사 주지를 맡고 있던 운담법전(雲潭法田) 스님과 맺어졌다. 

계룡산(845m) 연천봉 아래의 등운암(騰雲庵) 주지를 맡았다. 대웅전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다 쓰러져가는 양철 지붕의 허름한 건물이었다. 더욱이 무속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등운암 주변은 ‘강력한 지기(地氣)가 뻗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철조망을 두르고 산문을 닫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도량에서 영하 25도를 오르내리는 한파를 견뎌냈다. 낮에는 물론이고 밤에도 연천봉 주변 순찰을 네 번씩이나 돌았다. 징을 치거나 방울 흔드는 무속인들을 무수히도 내려보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서야 초파일 즈음에 산문을 열었다. 
 

고려산 속의 적석사. [강화군청]
고려산 속의 적석사. [강화군청]

등운암 대웅전 불사 원력을 세웠다. 주지의 뜻을 천명해야 했는데 ‘말 한마디’로는 불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신원사 위의 보광원에서부터 등운암까지 2km의 산길을 ‘삼보일배’로 올랐다. 3시간 30분에 걸쳐 산을 오른 후 신도들과 함께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정근을 이어갔다. 매월 한 번 진행된 삼보일배 정진은 3년 동안 이어졌고 그 힘으로 대웅전을 세웠다. 등운암에서 5년 동안 정진한 제민 스님은 부여 무량사 주지를 역임한 후 적석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2017∼) 

10년을 절에 다닌 불자도 하루 삼천배는 선뜻 나서도 하루 1만배는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소원이 이뤄진다고 했으나 바라는 건 없었습니다. ‘그냥, 절하다 죽어도 좋다’고 작정했을 뿐입니다. 1000배쯤 하니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습니다. 절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이것만은 끝까지 해내야 한다’라고 되뇌었던 기억이 납니다. 몸은 점점 힘들어도 마음은 갈수록 가벼워지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또다시 실패한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멈출 수 없었을 터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땀보다 더 짜고 진한 눈물이 절하는 내내 하염없이 흘렀다.

“살아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흘렀습니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다시 시작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실패했다고 육신을 함부로 한 데 대한 참회요, 자살하려 했던 자신을 위로하고 용서하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등운암은 계룡산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헬기가 아니고는 서까래 하나 온전히 올릴 수 없다. 건축비만도 산 아래에 짓는 것보다 20배가 더 든다. 승복 바지에 피가 배는 삼보일배가 아니었다면 불자들의 정성은 답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총 6740회의 헬기가 떴으나 부처님 삼존불과 향로, 촛대 등의 불구 일체는 제민 스님과 신도들이 지게에 지고 올라갔다.

“부처님을 궤짝에 넣고 들어 올린다는 게 신경 쓰였습니다. 신도님들에게 제 심정을 전하니 부처님 이운 당일 100여 명이 오셨습니다.”

부처님을 점안하는 날 사부대중 1000여 명이 운집했다.
 

적석사 낙조대 전경. [강화군청]

삼보일배로 산길을 오른 제민 스님은 ‘상월결사 인도성지 순례길’을 걸었다. 1167㎞ 대장정에 앞서 적석사에서 황청포구, 고려저수지, 망월돈대, 창후리 선착장 등의 코스를 왕복하며 매일 평균 25∼30여㎞를 걸었다고 한다. 심신 단련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공주 태화산 예비순례에 참석했습니다.(2020. 7) 3박 4일의 일정이었는데 회향하고 발을 보니 물집이 심하게 잡혀 있었습니다. 적석사로 돌아왔는데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나? 너무 안이하게 산 게 아닌가?’ 다음 날 아침, ‘물집이 곪든 터지든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작정하고 무작정 산을 떠나 걸었습니다.”

걷는 내내 쉬지 않고, 물 한 모금도 하지 않겠다며 작심하고 떠난 그 길.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다음 날 등의 단 며칠을 빼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한여름의 어느 날 너무 힘들어 적석사에 도착하자마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때 제 몸을 보았습니다. 모기, 날파리, 초파리, 하루살이 등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아, 이 모습이 나로구나!’ 했습니다.” 

7월 31일이면 홀로 걸은 지 만 3년이다. 

43일간의 인도 성지순례 대장정의 회고를 청했다.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걸으며 ‘전법’의 사명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께서 처음 한 일이 전법이었고,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부여한 것도 전법이었으며, 입멸에 드는 순간에도 전법을 당부하셨습니다. 상월결사 회주 자승 스님의 ‘전법 없이 불교중흥 없다’라는 일갈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인도 순례길에서 제안한 ‘상월결사 108원력’ 중 두 가지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전하려 합니다.” ‘교만과 분노가 아닌 존중과 용서를 실천하겠습니다.’ ‘동물과 미물이라고 해서 하찮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홀로 걷기 3년’을 통해 얻은 지혜 하나를 청했다.

“애초부터 평탄한 길은 없습니다. 그냥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가는 겁니다. 이 길이 바로 내 길이라고 할 만큼 인생에 정해진 길이란 없습니다. 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겁니다. 큰 돌이 막아서고 있으면 치울 방법을 생각하고, 강이 가로막고 있다면 건널 방법을 생각하면 됩니다. 힘들지언정 절망에 이르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평소에도 ‘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광활한 우주 속의 푸른 행성에 발 딛고 서 있다는 건 엄청난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나를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무상‧무아 속에서 우리의 존귀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민 스님의 기도는 교계에서도 정평 나 있다. ‘간절한 기도’란 어떤 기도일까? 

“기도는 지극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지극함’은 예불문에 명료하게 나와 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예를 올립니다.(至心歸命禮)’ 법당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도하며 ‘너무 덥다, 춥다’ ‘언제 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지극한 게 아닙니다. ‘춥다고 얼어 죽겠나. 얼면 또 어떤가!’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지극한 기도엔 분명 가피가 내립니다.”

그러고 보니 등운암 삼보일배, 상월결사 인도 성지순례, 3년간의 홀로 걷기 등에도 지극함이 관통한다. 언제 처음 그 지극함을 내었던 것일까. 

포천 수원산에서의 일화를 전했다.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분심이 일었다. 승복은 입고 있었으나 정식 출가도 하지 않은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던 거다. ‘에잇’ 하며 나무에 낫을 던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날과 손잡이가 이어진 ‘기억 자’ 부분이 ‘뚝’ 부러져 나갔다. 그 찰나 하나의 사실이 떠올랐다. 

“누가 입산하라고 내몬 게 아니었습니다. 수행하려 저 스스로 들어왔던 겁니다.”

이제껏 해 보지 않은 정진에 들어갔다. 말을 하지 않고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몸이 살려달라고 애걸했지만 타협하지 않았다. 끝내 ‘삼칠일 묵언‧금식 정진’을 회향했다. 그리고 계룡산 산문을 열었다. 

‘적석낙조’는 강화 8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힌다. [강화군청] 
‘적석낙조’는 강화 8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힌다. [강화군청] 

제민 스님은 낙조대의 해수관음상과 함께 노을을 볼 때 ‘고요’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 고요 속에서 누군가는 약간의 고독을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고독은 때론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 축적됩니다. 그러기에 고요 속에서 평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산사에서라도 홀로 바람과 꽃을 벗 삼아 지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합니다. 적석사 낙조대로도 초대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과 일몰을 바라보면 더욱 좋겠지요. 아니, 다툰 사람과 함께 오셔도 좋습니다. 갈라진 마음도 이어질 겁니다.”

지침으로 삼는 선‧경구를 청하니 “늦깎이 행자였지만 은사 법전 스님이 곁에 서 계셨기에 사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라고 한다.

“주지 소임을 보고 있던 은사 스님은 빨래도 손수 하셨습니다. ‘제가 하겠다’라고 하니 손사래를 치며 이르셨습니다.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데 나를 시중들 시간이 있겠느냐? 출가‧수행인은 보시를 받아 공부하는 사람이다. 촌각을 아껴 진력해야 한다.’ 지금도 명심하고 있습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제민 스님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계룡산 신원사로 출가해 운담법전 스님과 은사 인연을 맺었다. 등운암 대웅전을 조성하며 수승한 수행처로 변모시켰다. 등운암에서 5년 동안 주지로 주석한 후 부여 무량사 주지 소임을 본 후 2017년부터 강화 적석사 주지를 맡았다. 저서로는 ‘그대에게 가는 오직 한 길’이 있다.

[1687호 / 2023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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