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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4념처가 위빠사나명상인 이유

기자명 일중 스님

무상·고·무아 알고 방하착 가능해져

신수심법 알아차림 거듭하며
생멸현상 분명하게 관찰해야
마음챙김 예리하게 개발되면
관찰대상 놓치거나 잃지 않아

4념처명상은 위빠사나명상이다. 신념처에는 사마타로 수행 가능한 명상법들이 몇 개 있지만, ‘대념처경(D22)’에서 설하는 4념처명상법들은 모두 다 위빠사나방식으로 제시했다. 즉 4념처명상은 한 대상에 마음을 오롯하게 집중하고 고정시켜 삼매를 얻고자 하는 사마타 방법이 아니다. 신수심법 네 가지 대상을 분명하게 마음챙기고 알아차려서 통찰과 지혜를 얻고 궁극적으로는 열반을 성취하고자 하는 위빠사나명상법이다. 그래서 4념처명상이 위빠사나명상이라고 하는 말은 100% 맞는 말이고 자연스러운 표현법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4념처명상이 왜 위빠사나명상인지 ‘대념처경’을 근거로 하나하나 그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4념처명상은 ‘빠자나띠(pajānati)명상’이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대념처경에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꿰뚫어 알아야 한다”라는 동사 ‘빠자나띠’가 130번 넘게 등장한다. 한 경전에서 같은 단어가 이렇게 많이 반복 등장한다는 것은 강조의 의미도 있고 중요한 내용이라는 해석도 할 수 있다. ‘빠자나띠’는 지혜, 통찰지를 의미하는 빤야(Paññā)의 동사형이다. 즉, 4념처명상은 지혜와 통찰을 얻고자 ‘빠자나띠’해야 하는 방법이기에 4념처명상은 위빠사나명상이다.

4념처명상은 또 ‘아누빠사나(anu passanā)명상’이다. ‘아누빠사나’란 대상을 거듭거듭 따라서(anu) 계속 보고 관찰함(passana)이란 의미로 한문으로는 수관(隨觀)이라고 했다. 즉 몸과 느낌, 마음과 법의 모든 현상을 놓치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마음챙기고 분명한 알아차림을 연속적으로 해나가는 것을 ‘아누빠사나’라고 한다. 그래서 대상의 모든 현상을 ‘아누빠사나’해야 하는 4념처명상은 당연히 위빠사나명상이다. 

4념처명상이 위빠사나명상인 이유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근거자료는 바로 ‘대념처경’에 21번이나 등장하는 후렴구이다. 부처님은 한 가지 명상법을 설명한 뒤에 바로 후렴구(정형구)로 강조 요약을 하신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위 인용문은 수행자가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지, 그리고 수행의 진전과 향상과정을 점차적인 단계로 보여주고 있다.  

4념처명상은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는 명상’이다. 인용문을 보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라”고 했다. 즉 4념처명상은 일어남과 사라짐을 분명하게 마음챙기며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찰라생 찰라멸하는 무상성을 지혜로써 보아야 하고, ‘나’라는 존재의 실상과 진리를 선명하게 깨닫고자 하는 명상법이기에 4념처명상은 위빠사나명상이다.

4념처명상은 ‘무집착 방하착의 명상’이다.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의 힘이 예리하게 잘 계발되면 관찰대상을 놓치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바로 그런 때에 위빠사나 지혜가 연기적이고 점차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마음챙김과 지혜만이 성성적적하게 현전할 때, 수행자는 알아차리고 관찰할 뿐이다. 더이상 무명과 갈애를 일으키지 않고, 몸이 영원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자아라고 착각하는 사견과 전도견을 놓아버린다. 단지 물질과 정신 현상이 조건발생(연기)이라 알게 된다. 즉 무상고무아를 수행의 지혜로써 알기 때문에 더이상 상카라는 일으키지 않고 그저 관찰할 뿐이다. 어떤 것도 움켜쥐지 않는 무집착, 방하착이 가능해진다.

일중 스님 동국대 강사  satiupekkha@hanmail.net

[1689호 / 2023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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