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4. 종말 직전의 지구에 관한 어떤 학설

자연계서 벌어지는 온갖 재난은 내 심연의 비극

유식에서 기세간은 나의 심연에 깊게 드리워진 광활한 우주
한 중생이 수용하는 기세간 범위는 신통으로 갔다 오는 곳
괴겁 도래해 이곳에 아무도 없을 때도 타방 중생 식엔 존속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의 아뢰야식 안에 항상 지극히 미세하고 광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 [픽사베이]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의 아뢰야식 안에 항상 지극히 미세하고 광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 [픽사베이]

아주 오래전 충무로 전철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청년이 나를 붙잡고는 “내 조상들이 나를 씨종자로 삼아 안타까운 원을 실현하려 한다”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나도 모르는 나의 운명적 의무 같은 것이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한번 들어나 보자 하는 생각으로 그를 따라갔다가 결국 엉뚱한 이야기만 듣게 되었다. 그는 나의 전생과 현생에 걸친 거창한 목표, 이 우주의 놀라운 미래를 이야기했고, 또 종말과 구원의 필연성을 믿게끔 의도된 말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나의 관심사는 내 인생에 과연 어떠한 의무가 지워져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물었더니, 그는 대답 대신에 “중요한 비전(秘傳) 전수를 위해 3일만 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 비전을 꺼내 슬쩍 보여주었다. 그것은 신수대장경 활자체로 된 어떤 불교 경전으로, 거기에 괴겁(壞劫: 세계가 무너지는 시기)의 상황을 설한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그곳을 나왔다. 지금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 청년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가 그 일화를 떠올린 것은 이제부터 나도 불교 경론의 말씀을 빌려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려 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청년이 보여준 비전에 확 깼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가 조잡하고 자의적인 경전 해석으로 종말론에 빠졌다고 여겼다. 모든 믿음은 순수하지만 차가운 이성의 빛도 중요하다고 절실히 느꼈다. 그런데 막상 마치 종말의 징후들처럼 여겨지는 질병과 기후 재앙과 전쟁 등으로 몸살을 앓는 저 기세간(器世間: 자연계)에 대해 말하려니까, 내가 그 청년에 비해 얼마나 더 이성적이고 유익한 말을 하게 될지 의문이 든다. 나는 예전의 한 논문 안에서 기세간에 대한 학설을 다룬 적도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복잡한 학설보다는 흔한 비유에서 진실을 찾으려 하고, 문헌을 보면서도 뜻밖의 재미있는 문구를 찾으려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기세간에 대한 나의 이야기도 그 연속 상에 있다. 누군가 내 이야기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에 기반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내가 저 기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말해보겠다. 오랫동안 공부해온 유식의 교설 때문인지, 나는 언제부턴가 저 기세간은 나의 심연에 깊게 드리워진 광활한 우주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생을 받는 순간부터 각자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심층의 근원적인 식)을 자기의 총체적 과보로 수용한다. 그 식으로 인해 그는 인간이다. 그 식이 인간의 몸을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고, 또한 그 몸에 의지처가 되거나 수용될 수 있는 기세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인간을 대변하는 그의 아뢰야식은 본래 그 안에 자기의 몸과 기세간 전체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그 식은 언제나 단박에 그것들의 전체를 알아차리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초점을 저 기세간에 맞춰보겠다. 미륵의 후예들에 따르면, 아뢰야식이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는 기세간의 무차별적인 상(相)은 지극히 미세하고 광대해서 불가지하다. 또 신역 ‘화엄경’의 이런 게송이 인용되기도 한다. “보살이 관함에 세간은 망상의 업으로 일어난 것이니, 망상이 무변하므로 세간도 무량하다네.”(태현 ‘성유식론학기’ 제2권) 나는 이런 말들을 이렇게 이해하였다. ‘아직 깨닫지 못한 나의 아뢰야식 안에 항상 지극히 미세하고 광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 그것이 나의 심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세간에서 벌어지는 온갖 재난은 내 심연의 비극이리라.’

이쯤에서 냉철한 과학도 중 누군가는 웃어넘길지 몰라도 미륵의 후예들과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유식론’의 논의를 따라가다, 종말 직전의 세계에 대한 뜻밖의 발상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논의는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누구의 이숙식(異熟識: 아뢰야식의 이명)이 이 세계를 변현하는가. 현재 살고 있는 자의 식에 이 세계가 나타나거나, 그리고 장차 태어날 자의 식에 예상하는 세계로 현현한다. 그런데 만약 모든 중생이 이미 다 사라졌고 기세간도 점차 무너져가는 괴겁의 때에는 그 두 부류마저 없는데 아직 남아있는 이 세계를 누구의 식이 변현하는가. 이곳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진 타방 외계인의 식(識)이다. 이에 관해서도 꼼꼼한 문답이 이어지는데, 그 취지는 이런 것이다. ‘타방 중생 중에는 이곳의 욕계 중생과 비슷한 업을 짓는 자가 있을 수 있다. 욕계 중생의 아뢰야식에는 욕계의 몸, 그리고 그 몸에 의지처가 되고 수용되는 세계도 함께 현현한다. 만약 이 세계가 저 타방 중생의 몸에 대해서도 그런 쓰임이 있다면, 그의 식에도 이 세계가 나타난다. 그래서 괴겁이 도래하여 이곳에 아무도 없을 때도 저 타방 중생의 식에는 여전히 이 세계가 존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점잖은 원측 스님도 가세하여 한마디 거들었다. 그에 따르면, 한 중생이 수용하는 기세간의 범위는 이 정도로 가늠해볼 수 있다. “몸이 현재 머무는 데서 신통력으로 갔다 돌아올 수 있는 곳.”(태현 ‘성유식론학기’ 제2권) 이 단순한 문구가 찜찜했던 마지막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어떤 과학 이론에 따르면, 설령 외계인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외계인을 만날 수 없다. 그들의 행성과 우리들의 행성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빛의 속도로 움직여도 결코 살아서 만나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과학도들은 왜 외계인이 접시 모양의 비행체를 타고 다닌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극히 멀리 떨어진 곳은 오히려 마음의 힘[意勢: 신통의 한 종류]으로 단번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곳의 중생이든 저곳의 외계인이든 신통으로 갔다 오는 곳을 자기의 기세간으로 삼을 수 있다. 다만 범부와 부처님의 신통은 현격해서 각자 신통으로 이르는 범위가 다르다. 가령 ‘인왕경’에서는 부처님 설법을 듣기 위해 타방 보살들이 많은 권속과 함께 이곳에 와서 공중에 머문다.

나는 한때 이런 생각을 자주 하였다. ‘지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될수록 여러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아름답고 은밀한 풍경을 많이 보아두어야 한다. 짙은 어둠 속에서 올빼미가 그러하듯, 혹은 깊은 바다 밑에서 물고기가 그러하듯 말이다.’ 이런 것이 지구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종말 직전 누군가 운 좋게 최후의 한 명으로 살아남는다 해도, 인간과 운명을 함께 했던 지구의 마지막 모습까지 지켜보지는 못할 것이다. 괴겁 시에 인간이 지구보다 먼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 타방의 어떤 외계인이 한 점의 별빛으로 축소된 지구를 보고 있거나, 혹은 이곳에 와서 지구의 다채로운 풍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위안이 된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오래 이 지구를 지켜보다가 종말 직전 지구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90호 / 2023년 7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