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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8)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4)

화엄 십산‧화엄 십찰은 의상 교학 널리 유포됐음 알리는 상징적 표현

10개 사찰이라면서 법장화상전에 12개, 삼국유사에 6개 사찰
부처님 10대 제자처럼 충만한 의미 드러내려는 관념적 표현
의상과 직접 관계 없음에도 후대 의상 창건 설화 사찰들 등장  

의상의 법손들은 왕경으로도 진출하여 김대성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불국사와 석불사를 창건했다. 사진은 불국사 전경.    [경주문화관광]
의상의 법손들은 왕경으로도 진출하여 김대성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불국사와 석불사를 창건했다. 사진은 불국사 전경.    [경주문화관광]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교단 조직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의상의 화엄교학은 10대 제자를 비롯해 많은 제자들과 법손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어 9세기 이후에는 주류 종파로 대두하게 되었다. 의상의 문도가 번성하고 화엄종이 융성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십대제자(十大弟子)’와 함께 거론되는 화엄대학의 ‘10산(十山)’, 또는 화엄종의 ‘10찰(十刹)’이라는 표현이다. 화엄의 ‘10산’, 또는 ‘10찰’에 대해 언급한 자료로는 다음 두 기록을 들 수 있다. 먼저 신라 말기의 최치원은 ‘법장화상전’에서 법장의 서신이 전해 온 것을 계기로 의상 교학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구절에 다음과 같은 자주(自註)를 붙이었다. 

“해동에 화엄대학으로 10산이 있었다. 중악(中岳) 공산(公山) 미리사(美理寺), 남악(南岳) 지리산(智理山) 화엄사(華嚴寺), 북악(北岳) 부석사(浮石寺), 강주(康州) 가야산(迦耶山) 해인사(海印寺)와 보광사(普光寺), 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계룡산(鷄龍山) 갑사(岬寺), 삭주(朔州) 화산사(華山寺), 양주(良州)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비슬산(毗瑟山) 옥천사(玉泉寺), 전주(全州) 모악(母岳) 국신사(國神寺),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 청담사(靑潭寺) 등의 십여 곳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조에서는 “의상은 10찰(十刹)에서 전교케 했는데, 태백산(太伯山) 부석사(浮石寺), 원주(原州)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비슬산(毗瑟山) 옥천사(玉泉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岳) 화엄사(華嚴寺) 등이 그것이다.” 

이상 두 자료 가운데서 ‘법장화상전’은 12개 사찰, ‘삼국유사’는 6개 사찰을 들고 있는데, 두 자료에 중복하여 거명된 사찰을 제외하고 ‘법장화상전’의 12개 사찰과 ‘삼국유사’에서만 거명된 비마라사를 합하면 모두 13개 사찰이 된다. 그런데 ‘법장화상전’의 12개 사찰은 가야산에 2개의 사찰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화엄대학이 있던 11개의 산을 중심으로 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10찰’이라고 표현하면서 실제는 화엄종에 속한 사찰 6개만을 열거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십산’이나 ‘십찰’이라는 표현은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숫자는 아니고, ‘십대제자’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화엄교학의 숫자 개념에서 부족함이 없는 충만 된 수(滿數 또는 盈數)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10산’이든, ‘10찰’이든 이것은 모두 의상의 화엄교학이 널리 유포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예증으로 쓰여졌던 관념적인 개념이었고, 실제 10개 산의 이름이나 사찰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표현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10산’은 중사(中祀)로 받들었던 북악(태백산)·남악(지리산)·서악(계룡산)·중악(팔공산) 등 지방 4방위의 명산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화엄종의 사찰이 널리 분포되었음을 나타내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5악 가운데서 동악(東岳)인 토함산(吐含山)의 불국사(佛國寺)를 비롯해 왕경이나 그 주변 사찰들을 일체 제외하고 각 지방 명산 소재의 사찰 위주로 열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상과 그 법손들과 직접 관련된 사찰들이 ‘삼국유사’나 ‘법계도총수록’ 등의 자료에 다수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제외되었던 반면, ‘법장화상전’에서 거명한 12개 사찰이 모두 의상과 그 법손들에 의해 개창된 것만이 아니었음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의 ‘10찰’은 고려 후기 13세기 즈음 화엄종에 속한 각 지방의 사찰 가운데서 특히 유력한 6개의 사찰을 열거하는 데 그쳤으면서도 화엄종 세력의 전국적인 확대, 또는 화엄사찰의 전국적인 분포 상황을 화엄적인 의미를 가진 ‘화엄10찰(十方에 존재하는 무수한 세계라는 의미의 十方刹)’이라고 표현하였고, 또한 의상의 화엄종이 주류적인 정통의 종단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전교10찰(傳敎十刹)’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의상 계통의 화엄종은 신라 말기인 900년대에 이르러 주류적인 종단으로 등장하였으며, 고려시기에는 교종을 대표하는 종단의 위치를 확보하여 선종9산, 이어 조계종과 양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화엄종은 교학에서만이 아니고 화엄적인 미타신앙과 관음신앙이 당시 사회에 넓게 수용됨으로써 ‘화엄10찰’은 명실상부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표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두 자료에서 열거된 13개 사찰 가운데 위치와 규모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반이 되지 않고, 사찰의 창건 경위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부석사·화엄사·해인사 등 몇 개 사찰에 불과하다. 특히 의상 화엄종의 종찰인 부석사를 비롯하여 화엄사와 해인사 등 3개 사찰만이 신라 화엄종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유지되어 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보원사·갑사·범어사·옥천사·국신사 등 5개 사찰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거나 유적이 보존되어 상당한 대찰의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비마라사와 화산사 등 2개 사찰은 사지만이 겨우 추정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이설도 없지 않다. 그밖에 청담사·미리사·보광사 등 3개 사찰은 위치도 추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조선왕조 500여 년의 폐불정책으로 말미암아 화엄종을 비롯한 전체 불교사의 맥이 끊어져버린 불행한 결과이다. 

이상의 화엄10찰 가운데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과 직접 관련된 사찰은 부석사뿐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의상 입적 이후 9세기 즈음에 이르러 그 법손들에 의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일부 사찰은 의상의 계통과는 다른 화엄승들에 의해 창립되었다가 뒤에 의상계의 화엄종 소속으로 편입된 것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더 이상의 이해 추구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오늘날 불교사학계에서의 의상의 화엄종 연구가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서들의 이해에 집중되어 있고, 화엄종의 종단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등한시되어 화엄종의 교학과 교단의 역사에 대한 전모가 밝혀지지 못한 실정임을 고려할 때 화엄10찰에 대한 이해는 한계의 벽에 부닥쳤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만 불교고고학과 불교미술사학 분야에서의 이해가 진전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화엄10찰 이외에도 신라시대 화엄종 사찰로 전해져오는 것은 상당히 많다. 특히 의상이 창건했거나 주석했었다는 사찰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양양 낙산사(洛山寺), 천축산 불영사(佛影寺),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달마산 도솔암(兜率庵) 등은 의상이 직접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으며, 왕경 황복사(皇福寺), 상주 사불산 미면사(米麵寺), 청도 적천사(磧川寺), 찬관산 의상암(義相庵) 등이 의상과 인연이 깊었던 사찰로 거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거명된 사찰 가운데 의상과 실제 인연을 가진 사찰은 왕경의 황복사 1개 사찰뿐이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의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후대에 화엄종의 주류 종단으로 등장한 이후 의상에게 가탁된 것으로 본다. 특히 양양의 낙산사는 ‘삼국유사’ 낙산이성조에서, 의상이 670년 당에서 귀국한 직후 낙산을 찾아가서 괸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주고 있으나, 낙산사의 창건설화는 그보다 훨씬 후대에 관음신앙이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의거하여 화엄종의 진신주처신앙으로 자리 잡은 다음에 만들어진 연기설화였다고 보며, 선종 사굴산파의 개창조인 범일(梵日)이 낙산에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조성한 858년 이후였다고 추정되는데, 이 문제는 의상의 신앙을 다루는 기회에 다시 언급될 것이다.

먼저 의상과 직접 관련된 사찰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어야 할 것은 황복사였다. 의상은 원래 진골귀족 출신으로 왕경의 황복사에서 15세 즈음 출가하였고, 670년 당에서 귀국한 이후 한 동안 주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74년 표훈과 진정 등 10여명의 제자들에게 ‘일승법계도’를 강의했다는 사실이 ‘법계도총수록’에서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황복사에서 제자들과 함께 탑돌이를 하였다는 설화가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황복사는 중대의 왕실과 관계가 특히 깊은 사찰이었는데, 706년 조성된 ‘황복사 금동사리함기’에 의하면, 신문왕과 신문왕비, 그리고 효소왕을 위해 석탑을 건립하고, 이어 사리와 불상 등을 봉안하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의상과 황복사와의 관계는 그의 문도들에게도 대대로 이어져 760년 의상의 제자인 표훈이 황복사에 주석하면서 화엄을 강의했으며, 특히 균여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에서는 각간 대정(大正, 金大城)의 요청으로 대중에게 화엄의 삼본정(三本定: 佛華嚴定·海印定·師子奮迅定)을 강의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추측컨대 이 강의를 계기로 하여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불사를 창건하게 되었고, 준공 뒤에는 표훈, 그리고 의상의 법손인 신림 등이 주석하면서 화엄을 강의했던 것이다. 황복사는 9세기말 즈음에도 의상의 법손들과의 관계는 계속되어 화엄결사가 조직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의상은 문무왕의 명을 받아 676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게 되면서 황복사를 떠나 주로 부석사와 그 인근 지역을 무대로 화엄학을 강의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중앙 정치권력과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의상은 부석사를 근거로 태백산의 대로방(大蘆房)과 소백산의 추동(錐洞) 등지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여 ‘도신장’이나 ‘추동기’ 등의 필록을 남기었다. 그런데 태백산 인근 지역에는 의상의 법손들에 의해 여러 사찰들이 창립되어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10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진(悟眞)의 안동 하가산 골암사(鶻嵓寺), 진정(眞定)의 소백산 비로사(毘盧寺)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불리던 신림(神琳)의 세달사(世達寺, 뒷날의 興敎寺)와 월유사(月瑜寺) 등도 유명하였다. 그런데 의상의 법손들은 태백산 일대를 무대로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왕경으로도 진출하여 경덕왕대(742~765) 표훈과 신림 등은 중앙귀족인 김대성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불국사와 석불사를 창건하고 주석하였다. 그리고 신림의 제자인 순응(順應)은 애장왕대(800~809) 성목태후(聖穆太后)의 후원으로 해인사 창건을 시작하고, 제자인 이정(利貞)이 준공함으로써 최치원으로 하여금 그들 2인의 전기를 저술케 하였다. 

특히 해인사는 900년 전후로 현준(賢俊)·정현(定玄)·결언(決言), 그리고 희랑(希朗) 등을 연이어 배출함으로써 신라 말기 화엄종을 융성케 하였고, 고려로 이어져 화엄종의 주류를 형성케 하였다. 해인사에서 배출된 인물 가운데 특히 결언은 경문왕(861~875)이 원성왕의 원찰로 건립한 숭복사(崇福寺)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숭복사는 바로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봉안한 화엄종 사찰이었다. 그리고 희랑은 후삼국시대 의상의 직계 법손들인 북악파(北岳派)를 대표했으며, 고려태조 왕건과 연결되어 남악파(南岳派)의 영수인 관혜(觀惠)와 대립하면서 당시의 화엄종을 양분하고 있었음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92호 / 2023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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