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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니까야와 업보윤리-상 

행위보다 결과의 도덕성 초점 맞춘 가르침 많아

업의 법칙은 공덕과 관련되며 공리주의적인 요소 다분히 내재
행위가 빚어내는 필연적인 결과 설명하며 불선 삼갈 것을 강조
행위의 결과가 선악 범주 벗어난 것은 아라한의 행위만이 가능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따져보라는 것은 공리주의적 요소가 다분. [법보신문DB]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따져보라는 것은 공리주의적 요소가 다분. [법보신문DB]

불교윤리에서 ‘업과 업보’의 관계는 서양윤리학에서 말하는 ‘행위와 결과’의 관계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내용상의 차이점에 앞서 우선 형식상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일부 불교학자들이 불교윤리를 결과주의적 사고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물음을 되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옳고 좋은 행위였기 때문에 그 결과도 옳고 좋은 것이 되는가, 아니면 결국 옳고 좋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그 행위가 옳고 좋은 것으로 판명되는가?” 전자는 의무론적 입장이고 후자는 결과론적 접근으로 불린다. 우리가 함께 읽어 볼 스테판 에반스(Stephen Evans)의 ‘니까야 윤리에서 행위와 결과의 문제(Act and Result in Nikāyan Ethics)’(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21, 2014)는 이와 관련된 논의들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니까야’에서 업의 법칙은 ‘공덕(puñña)’과 관련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공덕은 개인의 창고에 저장되었다가 훗날 어쩌면 천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도 확장되는 ‘선한(kusala)’ 행위들과 그 ‘선함(goodness)’의 힘이다. 반대로 ‘불선한(akusala)’ 행위들은 ‘파파(pāpa)로도 알려진 ‘불공덕(apuñña)’을 낳는데, 이것 역시 축적되어 있다가 나중에 지옥에 태어나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비파카(vipāka; 열매)’를 가져온다. 일반적으로 ‘선한(kusala)’ 행위들은 ‘비탐(alobha)’ ‘비진(adosa)’ 및 ‘비치(amoha)’에 뿌리를 둔 좋은 행위들이고, ‘불선한(akusala)’ 행위들은 ‘탐(lobha)’ ‘진(dosa)’ ‘치(moha)’에 의존하는 나쁜 행위들로 규정된다.

업의 법칙에 대한 언급들은 ‘니까야’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당시의 문화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업과 업보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출라깜마비방가 수타(Cūḷakammavibhaṅga Sutta)’는 다양한 종류의 행동이나 습관적인 행동들과 연관된 ‘비파카’로서 상세한 목록의 ‘윤회 목적지(rebirth destinations)’ 즉 환생처를 열거하고 있다. 어떤 행동들은 지옥 또는 설령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행위에 상응하는 상태를 피할 수 없다. 동물의 살생은 인간의 몸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수명은 형편없이 짧다. 다른 존재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난 인간존재로 사는 동안 병마의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흉측한 몰골로 태어나기를 약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질시하면 평판과 영향력의 저하를 초래하고, 수행자 브라만에게 아픔을 주는 것은 가난을 초래하며, 오만함은 낮은 등급의 출생을 불러온다. 반면, 이와 반대되는 행동들은 그에 걸맞게 축복받은 환생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사실 ‘니까야’에는 윤리적 가치평가에서 행위보다 그것의 결과인 ‘비파카’의 우선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암발라티까라훌로바다 숫타(Ambalaṭṭhikārāhulovāda Sutta)’에서 붓다는 아들 라훌라에게 고통스러운 열매를 맺는 행위를 ‘아쿠살라’로 그리고 즐거운 수확을 가져오는 행위를 ‘쿠살라’로 정의하면서 개인의 행위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로운 것일지 여부를 면밀하게 따져보라고 조언하고 있는데, 이는 일상적인 의미의 ‘결과’와 윤리적인 의미의 ‘업보’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벨레즈 드 세아(Velez de Cea)는 이를 불교윤리에 공리주의적인 요소를 주입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비파카’의 윤리적 우선성에 대한 더욱 강력한 사례는 ‘케사무티 숫타(Kesamutti Sutta)’에서 발견된다. 경전 속의 대화에서 칼라마는 붓다가 우리는 탐·진·치 때문에 생명을 빼앗고, 도둑질하며, 결혼한 여자를 뒤쫓아 다니고, 거짓말하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에 맞장구를 친다. 두 사람은 그와 같은 행동이 기껏해야 불이익과 고통을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는 ‘결과’와 ‘비파카’의 고유한 의미를 둘 다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붓다는 어떤 태도와 행위들은 ‘아쿠살라’이며, 그것이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사람들은 이런 행위들을 삼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쿠살라’의 행위와 ‘아쿠살라’의 행위가 각각 빚어내는 선악의 결과, 즉 ‘비파카’의 도덕적 중요성을 거듭 일깨워주고 있는 부분이다. 이와 대칭적인 언급은 ‘비탐, 비진, 비치’에 대해 일어나며, 그것에 따른 행위들은 반대로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게 된다. 이처럼 붓다는 각자의 행위들이 ‘쿠살라’나 ‘아쿠살라’가 되는 것은 일상적이고 업보적인 측면 양자 모두에서 그것이 낳는 결과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보듯이 도덕적 평가에서 ‘비파카’를 강조하는 것은 니까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들이다. 예컨대, ‘앙굿따라 니까야’ 1권 57쪽에서 붓다는 그가 왜 ‘비행(duccarita)’을 저지르지 말라고 가르치는지에 대한 아난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그 행위자가 자책하게 되거나 현자들의 비난을 받고, 좋지 않은 평가를 받다가 결국 혼란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그 업보로 다시 지옥에 태어날 것으로 예감되기 ‘때문에(tasmiṃ)’ 이렇게 가르친다고 설명한다. 엄격하게 말해 행위와 ‘비파카’의 분리, 즉 ‘마지힘마 니까야’ 3권 66-67쪽의 진술을 전제해 볼 때 좋은 ‘행위’가 고통스러운 ‘비파카’를 수확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은연중에 결과보다 행위 그 자체의 가치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진술의 논리적 함의가 의도된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와 같은 언급은 행위와 ‘비파카’의 관계가 하나의 덩어리임을 암시하는 증거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떤 행위가 ‘비파카’와 무관하게 ‘쿠살라’로 평가될 수도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아마도 아라한의 행위들이 ‘쿠살라’이긴 하지만 아무런 ‘비파카’도 산출하지 않는다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특별한 예외적 사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93호 / 2023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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