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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하안거 해제법어]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

  • 교계
  • 입력 2023.08.29 13:07
  • 호수 1695
  • 댓글 0

다리는 물길이든 땅 길이든 양분(兩分)되어 있는 그대로 하나가 되도록 이어주는 방편의 가운데 길이다.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지거나 나누어진 것을 연결하면서도, 그 사이의 흐름을 막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하나가 되도록 허공에 걸쳐 통하게 하는 다리는 곧 공로(空路)이며 중도(中道)이다.

이 중도는 바로 진제와 속제, 불변과 수연, 피안과 차안, 체와 용, 성과 상 등의 모든 분별을 통일하여 간극을 없애주며 세상의 어디에나 통할 수 있도록 하고 모든 것을 서로 융화시키는 것이다.

‘화엄경’ 정행품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강물을 바라볼 때는 중생들이 진리의 흐름을 따라 부처님의 지혜 바다에 들어가도록 원할지어다. 산골짜기의 물을 볼 때는 중생들이 먼지와 때를 씻고 맑은 마음이 되도록 원할지어다. 다리를 건너갈 때는 중생들이 누구나 나와 남을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다리처럼 되기를 원할지어다.”

수행하는 보살은 하나하나의 사물을 대하면서 모두에게 무연의 자비심을 내도록 발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을 가로 질러 건널 적에 얕은 물은 간단히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기도 하지만 깊은 물은 다리를 놓아야 한다.

지형따라 그 방법이나 모양이 각양각색이니, 다리마다 사연이 있고 그 이름도 다양하다.

다릿발을 물속에 꽂아 만든 꽂다리 즉 삽교(揷橋), 널빤지로 만든 판교(板橋), 뗏목을 만들어 걸친 뗏다리 즉 벌교(筏橋), 배를 잇달아 대어 이은 배다리 즉 선교(船橋), 큰 통나무 하나 걸친 외나무 다리 즉 독목교(獨木橋), 흙으로 덮어 만든 토교(土橋), 쇠로 만든 철교(鐵橋), 돌로 만든 석교(石橋), 무지개 모양의 홍교(虹橋)나 심지어는 까막 까치가 만들었다는 오작교(烏鵲橋)나 충절을 지켜 대가 솟아났다는 선죽교(善竹橋) 등등 다리마다 갖가지 설화가 있게 마련이며 그 다리가 그 지역의 지명이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요즘은 강이 아닌 육지의 찻길 위에다 그 흐름을 끊지 않도록 육교(陸橋)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사찰을 참배하러 갈 적에도 입구에서 많은 다리를 건너게 된다. 예전부터 중국 사원에 이름난 세 곳의 돌다리(三石橋)가 있었는데, 천태산(天台山)의 계곡 위에 천연적으로 걸쳐있는 천태 석교와 구운몽 소설에도 등장하는 남악(南岳)의 석교, 그리고 조주(趙州)선사가 주석하던 관음원 부근의 조주 석교였다.

옛날 중국의 조주 선사는 소박한 삶을 살면서 교화를 할 때도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할이나 몽둥이 같은 고준한 수단을 쓰지 않고, 일상생활의 자상하고 평범한 보통의 대화로 친절하게 제접하였다.

조주 스님의 법문은 은산철벽을 향해 울리는 부드럽고 평범하게 메아리치는 말씀으로 마치 봄바람이 불어 천 길 벼랑에 붙어있는 꽃들을 모두 피워내는 그런 부사의한 힘이 있다.

나름 공부깨나 했다는 어떤 선객이 조주 선사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오래전부터 조주의 돌다리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더니만, 와서 보니 그저 외나무다리[略彴]만 보입니다.” 하고 질박한 그의 가풍을 집적거렸다.

선기(禪機)가 날카로운 노고추(老古錐)인 조주선사는 어깨나 목에 힘주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농담처럼 부드럽게 되받아 돌려준다. “자네는 외나무다리만 보고 돌다리는 보지 못했구나.” 하였다.

강기로 밀고 들어오던 그 선객은 금방 백기를 들고 공손해지며 “어떤 것이 그 돌다리입니까?” 하였다.

조주 선사는 흐르는 물처럼 막힘없이 말하기를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 하였다.

그 스님이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외나무다리입니까?” 하니, 조주 선사는 “사람이 하나씩 건너 가니라.<箇箇度人>” 하였다.

누구나 건너가는 평등의 차별이며, 차별의 평등인 자비의 방편인 이 조주의 석교 이야기는 스스로 조주의 돌다리가 되어야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조계산 송광사의 골짜기에도 아름다운 전각의 지붕이 있는 무지개 돌다리인 극락교와 능허교가 있고, 수석정 가는 길에는 외돌다리<略彴>가 있다.

그리고 낙하담(落霞潭) 가에 지난 백년 동안 송광사와 애환을 같이 하며 많은 사람들이 건너다니고 불사를 위해 온갖 것을 실어나르던 오래된 낡은 다리가 있었다.

지난 봄에 그 다리를 헐어내어 새롭게 튼실한 둑을 만들어 조계수가 멈추는 낙하담을 약간 높이고, 무너미하는 둑 위에 다리 길을 만들고 보통교(普通橋)라고 이름하였다.

이 보통은 시방삼세에 두루 통한다는 뜻이다.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고 했다. 보통교는 이 세상 누구라도 어디라도 두루 널리 유통(流通)하는 다리이니, 사람도 건너고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고 산짐승도 건너고 차도 건너며 때로는 여럿이 때로는 하나씩 건너간다.

낙하담은 조계수가 멈추어 거울처럼 맑으니, 아침 저녁의 노을과 사시절의 아름다운 산경이 비치며 고요한 삼매 속의 절경을 이룬다.

교류수불류(橋流水不流)
하담개안정(霞潭開眼睛)
청풍여명월(淸風與明月)
거래불류정(去來不留情)

다리는 흐르고 조계수는 안 흐르니
낙하담은 맑아서 눈동자를 열었는데
맑은 바람 불어오고 밝은 달이 비추지만
오고 가는 그 정취를 남기지 않는구나.

오늘 해제를 하고 산문을 나서는 대중들은 이 보통교를 건너 동서남북 어디든지 인연따라 흘러가는 조계수처럼 걸림 없이 만행하기 바랍니다.

[1695호 / 2023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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