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군인의 용기

후쿠오카 오염수 방류문제나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를 둘러싼 이념논쟁에는 차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문적인 식견도 없었고. 하지만 고(故) 채수근 해병 사건을 담당했던 박정훈 해병대수사단장을 느닷없이 보직 해임하더니, 듣기만 해도 오싹한 집단항명 수괴죄로 몰아세우는 것을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고부대인 해병대 1사단장을 혐의 대상자에서 빼라는 대통령실의 직간접적인 지시를 어긴 것에 대한 괘씸죄가 분명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정작 본인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만 막무가내로 챙기는, 저 이율배반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따지고 보면 박 전 수사단장은 10년 전 부당한 수사 외압에 저항하던 강골 검사 윤석열의 데칼코마니가 아니던가. 그는 자식 또래 후배 해병의 어이없는 죽음을 가슴 아파하면서 관련 법령에 따라 엄정하게 조사하고 지휘계통의 결재를 거쳐 수사서류를 경북경찰청에 지체없이 넘겼을 뿐이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모두 법에 규정되어 있는 군사경찰 고유의 업무였고. 그런데 국방부 장관은 박정훈 대령에게 항명죄와 명예훼손죄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웠다. 국방부나 대통령실의 관계자들이 국회에 나와 어제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 군인을 나쁜 ‘놈’으로 모는 저열한 언행들은 또 어떻고.

이 와중에 해병대 예비역의 한사람으로서 ‘비겁한 해병’과 ‘용기 있는 해병’을 동시에 지켜봐야 하는 심정도 착잡하기 그지없다. 해병 1사단장은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마땅하고, 해병대 사령관은 숨김없이 진실을 다 밝혀야 한다. 해병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엊그저께 사관 후보 동기생들이 국방부 군사법원에 출두하는 전투복 차림의 박정훈 전 수사단장을 불러세우고 ‘팔각모 사나이’를 떼창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박 대령은 절도있는 거수경례로 고마움을 표시했고. 모처럼 해병대다운 모습을 본 것 같아서 순간 울컥했다.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이렇게 권력이 앞장서서 본연의 업무에 충실했던 한 군인을 저렇게 막 대해도 되는가 싶다. 대통령 놀음에 잔뜩 취한 듯한 난폭 운전자 윤석열 대통령을 많은 국민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겁’과 ‘만용’ 사이에 엎드려 있는 ‘용기’의 중용을 말했다. 매사에 너무 모자라도 너무 넘쳐도 안 된다는 뜻일 듯.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은 그런 용기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정당한 법의 준수와 군인의 본분을 통해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어떤 사람은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싹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군인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용기는 자기가 맡은 소임을, 끝까지 책임지고, 흔들림 없이, 수행하는 것일 터. 박정훈 대령이 그렇게 했다. 어느 조직에서나 바른말을 하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선후배 간의 기수문화가 독특하기로 악명높은 해병대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박 전 단장이 지금 겪고 있을 심신의 고통은 보나마나 들으나마나일 것이다. 사방에서 ‘네 말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방법이 틀렸다’는 등과 같은, 허무한 양비론의 융단폭격을 맞고 있을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잘 견뎌내야 한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뿐. 그래도 ‘해병의 긍지’를 떠올리면서 꿋꿋하게 버텨줬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꼭 무죄를 받고 원대 복귀해서 꽃다운 나이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채수근 해병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도 약속하고. 박 전 수사단장의 어머니께서도 신심 깊은 불자라는 말을 들었다. 불보살의 가피가 당신을 끝까지 지켜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 힘내시기를! 당신의 이유 있는 항명이 역설적이게도 잃어버린 공정과 상식을 되찾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대와 같은 용기 있는 군인이 있어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살만한 나라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96호 / 2023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