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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새벽 닭소리 - 이동순

기자명 동명 스님

견성은 좌선 아닌 문득 오는 소식

새벽 닭울음에 의문 생긴 작가
견성의 환희 노래임을 깨달아
서산·사명도 닭울음 선시 남겨
공부는 한순간 이뤄짐 알게 돼

산성 마을에 와서
새벽 닭소리 듣는다
저 닭들은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홀로 깨어서 홰를 치며
왜 저리도 큰소리로 자꾸 외치는가
한참 생각하다가
그 사연과 까닭 문득 깨달았다
닭들은 밤새도록 하늘의 경전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달과 별과 구름의 운행
벌레소리와 안개의 조용한 이동을 보다가
옛날 어느 큰스님이 그랬듯이
한순간 알았다 알았다 되풀이하며
그 기쁨 못 참고 날개까지 푸드득거리며
통쾌한 깨달음의 소식
혼자 목청껏 외치는 것이다
(이동순 시집, ‘고요의 이유’, 애지, 2022)

광명 금강정사에서 기거하던 시절, 새벽에 예불 올리고 기도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닭울음 소리가 맞장구를 쳐준다. 그때 나는 닭이 우리가 예불하는 소리를 듣고 함께 노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예불하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더욱이 닭들이 밤새 하늘의 경전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다.

이동순 시인은 산성마을에 와서 화두가 하나 생겼다. 산성마을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오래 된 마을이다. 유서 깊은 고요한 마을에서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새벽기도를 하는 입장에서는 새벽이라고 보아도 될 시각, 닭들이 홀연히 깨어서 홰를 치며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저 닭들은 한밤중에 무슨 할 말이 있어 저리 큰소리로 외치는 것일까?’라는 화두를 갖게 되었다. 저 닭들에게 무슨 역사적인 사명이라도 있단 말인가? 이뭣고?

나는 닭울음 소리가 선사들이 외치는 ‘할(喝)’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동순 시인은 오랜 화두 참구 끝에 ‘할’이 아니라 견성의 환희를 노래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할이 제자들의 무명(無明)을 깨우치기 위한 스승의 일갈이라면, 어두운 새벽의 닭울음 소리는 통쾌한 깨달음을 얻은 닭들이 무명을 박차고 밝은 광명을 맞이하는 기쁨의 일갈이다.

이동순 시인에 따르면, 닭들은 밤새도록 하늘의 경전을 읽고 있었다. 달과 별과 구름의 운행을 살펴보면서 벌레소리와 안개의 조용한 이동까지를 찬찬히 읽다가, 한순간 알았다는 듯이 날개까지 푸드득거리며 통쾌한 깨달음의 소식을 목청껏 외친다는 것이다. 하, 그럴듯하다!

서산대사도 “지금 닭소리 한번 듣고서/ 장부의 할 일을 모두 마쳤도다(今聽一聲雞 丈夫能事畢)”(봉성 지다나가 한낮의 닭소리 듣다(過鳳城聞午雞))라고 노래했는데, 서산대사에게는 닭울음 소리가 견성의 환희라기보다는 할(喝)이었음에 틀림없다. 대사는 스승의 할에 해당하는 닭소리에 문득 깨달았으니, 그것으로 일대사 인연을 완성한 것이었다.

사명대사는 “금오(金烏)가 한밤중에 하늘바다 통과하매/ 홀로 의자에 기대어 새벽 닭소리 듣노라(金烏夜半通天海 獨倚繩床聽曉雞)”(밤에 심심풀이로 짓다(夜坐戱題))라고 노래했는데, 이 시에서 닭소리는 지혜로 이끄는 소리라기보다는 고요함으로 이끄는 소리이다. 태양이 한밤중에 하늘바다를 통과한다는 선적인 통찰과 함께, 홀로 새벽 닭소리를 듣는 선사의 마음결이 잔잔하게 물결치는 시이다.

옛 선사처럼 오늘의 시인도 닭울음 소리의 깊은 뜻을 읽을 수 있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의자에 홀로 기대어 새벽 닭소리를 듣는 선사처럼 닭들이 지긋이 눈을 감고 하늘의 경전인 “달과 별과 구름의 운행”을 읽고 있었음을 시인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볼 수 있단 말인가? 닭들이 땅의 경전인 “벌레소리와 안개의 조용한 이동”을 듣고 보고, 사명대사처럼 마음을 최대한 잔잔하게 하였다가, 서산대사처럼 마침내 문득 찾아오는 깨달음의 환희에 날개까지 푸드득거리며 목청껏 외쳤음을 시인이 아닌 그 누가 간파했단 말인가? 선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어야만 견성한다는 발상을 벗어난다면, 새벽 닭소리는 언제 어디에나 있어서 우리도 “옛날 어느 큰스님이 그랬듯이/ 한순간 알았다 알았다 되풀이하며” 날개를 푸드득거리는 날이 있을 것이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696호 / 2023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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