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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선의 르네상스 시대, 선사들의 관용

기자명 정운 스님

파벌보다 법 전하는데 역점 둬

​​​​​​​강서성의 마조·호남성의 석두
‘강호’ 어원, 두 선지식서 비롯
찾아온 제자까지 도반에 보낸
도인들 관용, 선의 발전 이끌어

옛말에 ‘한 마을에 강사는 둘이 못 살아도 도인은 둘이 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학문하는 강사끼리는 서로 시기 질투하면서 싸우지만, 도인들은 마음이 관용적이며 너그러워 함께 한다는 뜻이다. 물론 불교계만이 아니라 유교·도교 등을 포괄한다고 본다. 

당대(唐代)는 중국 불교[특히 선종] 최고의 르네상스 시대였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동시대의 선지식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제자일지라도 자신과 연(緣)이 맞지 않으면 다른 선사에게 제자들을 보내었다. 곧 파벌 싸움이 아니라 제자를 지도해 법을 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한편 당시 선수행자들 또한 수행에 대한 갈앙이 깊어 고난을 무릅쓰며, 선지식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당나라 중기, 벽안(碧眼)의 선사로는 마조(709∼788)와 석두가 대표적이다. 마조와 석두는 왕권 및 귀족적인 성향을 벗어나 시골[江西省과 湖南省]에서 법을 펼쳤다. 이후 강서[江西, 마조가 활동하던 강서성]의 ‘강(江)’과 호남[湖南, 석두가 활동하던 호남성]의 ‘호(湖)’를 붙여 ‘강호’라는 말이 생겼는데, 세상 천하를 의미한다. 간혹 중국에서 무술 고수들의 모임으로 쓰이는데, 원래는 마조와 석두의 선을 상징하는 용어에서 시발(始發)되어 현대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지명에 의해서 승려를 호칭할 때, 강호가 붙어 강호승(江湖僧)·강호중(江湖衆)이라고 한다. 또한 결제 기간을 강호회(江湖會)·강호승회(江湖僧會)이라고 불렀고, 승려가 머무는 당우를 강호도량(江湖道場)·강호료(江湖療)라고 하였다.

이렇게 강호라는 말은 마조와 석두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또한 당대 유명한 선지식으로 남양 혜충(?∼775)·경산법흠(714∼792)이 있다. 즉 마조·석두·경산법흠·남양혜충 등 여러 선지식들은 서로를 격려하는 도반들이었다. 이랬기 때문에 중국에서 선의 최고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했던 것이다.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1)은 조동종계의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석두는 마조에 비한다면 ‘산거(山居) 수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두는 산거 수행의 즐거움을 노래한 ‘초암가’ 등으로 낙도가의 계보를 형성하는 기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데서 연유해 선종사에서는 석두의 선사상은 순금만을 파는 진금포(眞金鋪)라고 하였고, 마조의 선은 많은 제자를 방편으로 거둔다고 하여 잡화포(雜貨鋪)라고 불렀다. 

‘앙산어록’에 의하면,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 마조의 증손자뻘 제자]은 “석두 화상이 순수하게 금만을 파는 진금포라면 나 앙산은 잡화포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방편법문을 잡화포라고 비유하며 마조와 같은 맥락에 자신을 두고 있다. 어떤 물건이든 다 파는 잡화포라는 말은 제자들의 근기에 맞추어 어떤 제자이든 다 제도해준다는 것을 자임하면서, 석두를 비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하지만 ‘송고승전’에는 “강서의 주인은 마조이고 호남의 주인은 석두로서, 수행자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이 두 대사를 찾아뵙지 않으면 무지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로 마조가 활동하던 당시, 마조와 쌍벽을 이룬 선사가 석두이다. 이에 석두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석두는 어떤 인물인가? 석두희천은 광동성 사람으로, 처음에 그는 육조혜능을 찾아가 출가했다. 석두의 나이 14세에 혜능이 입적했는데, 입적 전에 ‘청원행사를 찾아가 의지하라’는 유훈을 받아 청원행사(靑原行思, ?∼740)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석두는 청원에게 법을 받고, 42세 무렵 호남성 남악형산에 초암을 엮고 산거 수행자로서 수행을 시작했다. 그러다 그 부근에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현재 사찰[南台寺]이 현존한다. 이 남대사에서 지척 거리에 마조의 스승인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이 머물렀는데, 석두는 남악과도 법담을 나누었다. 곧 석두는 법은 청원에게서 받았지만, 그의 또 다른 스승은 남악회양이다. 당연히 남악의 제자인 마조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본다.

정운 스님 동국대 강사 saribull@hanmail.net

[1697호 / 2023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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