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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격동 90년대, 꺾이지 않은 언로의 중심

종교편향 집요하게 취재…개혁·분규 정면 돌파

1992년 교계 언론 최초 ‘기자 윤리 강령’ 채택 “보도책임” 선언
MBC선교방송·전차대대 훼불·대통령 국방부 예배 등 집중보도
정간·해고엔 ‘편집국 뉴스’로 대응…2005년 독립언론의 씨앗

법보신문은 1992년 교계 언론 최초로 '기자 윤리 강령'을 제정하고 책임있는 보도를 선언했다. 이후 공권력에 의한 종교편향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이를 묵과하지 않고 집요하게 보도해 마침내 시정을 이끌어냈다. 

1980년대 ‘새로운 불교’를 향한 열망에 호응하며 탄생한 법보신문의 행보는 창간 초기부터 불교계 안팎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정 종단에 국한되지 않고 기득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며, 범종단적으로 시선을 넓히고 정권을 향한 감시와 재야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담아냈기 때문이다. 법보신문에 어떤 기사가 실리는지는 불교계의 기류가 어디로 흐르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여겨지기도 했다.

법보신문 창간 멤버로 활동했던 최승천 전 조계종출판사 부문사장은 2018년 법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부 집권층에서 보면 달갑지 않은 기사가 1면 머리를 장식하기도 했다”며 “당시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 종로서 등의 ‘관선기자’(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기관원의 별칭)들은 이번 신문엔 어떤 기사가 나오느냐며 물어오는 일도 빈번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최 전 사장은 “특히 불교계 청년, 재야단체와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조계종단 밖에서 법보신문 기자들을 환영했다”며 “물론 상대적으로 ‘법보신문’에 기사가 나가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렇게 법보신문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을수록 기자들의 걸음은 더욱 바빠지고 어깨는 무거워졌다. 이는 1992년 법보신문 기자들의 ‘기자윤리강령’ 채택으로 이어졌다. 1992년 4월7일 법보신문 기자들은 기자윤리강령 선포식을 갖고 이를 신문 1면에 공포했다. 기자윤리강령은 △언론자유의 수호 △보도의 책임 △품위유지의 3개 항목으로 구성됐다. ‘외부의 간섭이나 압력에 의한 편집권의 침해를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한다’는 천명을 시작으로 ‘모든 부문의 중대사에 관하여 국민과 불자들이 알아야 할 진실을 밝힌다’ ‘불의와 부정에 대한 비판자로서 봉사하며, 정법구현에 앞장선다’는 성역없는 보도선언과 함께 ‘신문사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거나 그 밖의 개인적 이득을 꾀하지 않는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기자윤리강령 채택은 불교언론 최초의 일이었다. 이 강령은 지금까지도 ‘법보신문사 사규 및 취업규칙’으로 명시돼 있으며 편집국의 모든 종사자들에게 변함없이 적용되는 원칙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자윤리강령을 선언한 법보신문의 필봉은 더욱 날카롭게 ‘파사현정’의 장군죽비가 되었다. MBC가 10년 넘게 지속해 오고 있던 조용기 당시 순복음교회 목사의 선교 방송 저지를 위해 1992년 보리방송모니터회 등과 연대해 2개월에 걸친 집요한 보도로 부당함을 알렸고 방송중지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17사단 전차대대에서 불상을 쌀 포대에 담다 야산에 버린 훼불 사건을 법보신문이 단독 보도했다. 이후 지속적인 보도로 불교계의 공분을 알렸고 마침내 국방부 장관의 사과를 이끌어 냈다. ‘장로대통령’이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 부활절을 이유로 검정고시 날짜를 변경하고 대통령이 국방부 일요예배에 참석하는 등 정권에 의해 벌어진 종교편향을 거침없이 비판해 결국 정부의 사과와 시정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공권력과 공공기관에 의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던 종교편향에 대한 경종이자 불교계의 자주성을 각성시키는 결정적 계기들이 되었다. 

이처럼 불교 언론의 중심에 뿌리 내린 법보신문이 90년대 불교계에 휘몰아친 개혁과 분규의 태풍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1994년 조계종에 휘몰아친 거대한 변혁의 한복판에서 종단개혁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담아낸 법보신문은 신문발행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맞서 기자들은 ‘법보신문 편집국뉴스’를 자체 제작, 발행하며 중단없이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당시 편집국뉴스는 종단개혁의 진행 상황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매체로 활약했다. 이 때문에 불교계 안팎의 뜨거운 지지와 후원이 이어졌으며 당시 일반 언론들도 “조계종분규가 종단개혁의 물꼬를 튼 데는 분규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꼿꼿한 자세로 필봉을 휘둘렀던 ‘법보신문’ 기자들의 공도 크다(한국일보 1994년 4월14일자 보도 ‘법보신문 종단개혁의 “큰 공”’)”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1998년 조계종이 또 한 번 분규에 휩싸이며 법보신문에도 다시 외풍이 불어닥쳤다. 8월 불국사 주지가 교체되고 이어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가 석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편집부장 등에 대한 갑작스런 ‘해고 예고 통보’와 이에 반발한 기자들에 대한 파면·정직 처분 등이 잇따랐다. 결국 1993년 설립 이후 사실상 활동중지 상태에 있던 법보신문 노동조합은 일련의 사태를 ‘부당 노동 행위’로 규정하고 정면 대응에 돌입했다. ‘노보’를 발행해 편집권 침탈을 알리며 “불교언론을 지키고 나아가 불교개혁을 추동하는 일에 떨쳐 일어날 것”임을 재차 천명했다. 이후 리영희 고문, 박경훈 주필 등 불교계를 넘어 사회적으로 주목받던 최고의 필봉들이 신문사를 떠나는 아픔과 석 달여의 파행적 발행을 거쳐 마침내 기자들의 복직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수습은 사실상 임시 봉합이었다. 재정의 상당부분을 불국사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법보신문은 다시 외풍과 외압에 노출될 수 있는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는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2005년 법보신문이 독립언론으로 새롭게 출범할 수 있는 씨앗이 되었다. 1990년대는 법보신문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잉태의 시간이자 고단한 산통 끝에 탄생할 불교 언론 새 역사의 예고였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698호 / 2023년 9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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