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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세대의 가을앓이

베이비 붐 세대로 불리는 우리 또래는 무엇보다도 손편지 세대였다. 걸핏하면 영혼 없는 위문편지를 써야 했고, 친구의 낯 간지러운 연애편지를 돌려가면서 읽었다. 담임교사의 편지 샘플을 본보기 삼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두세 통의 위문편지를 뚝딱 써냈던 기억들이 아스라하다. 더러 마음에 없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짝꿍을 위해 작문 실력을 발휘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군인 아저씨 앞으로 배달될 위문편지가 교탁 위에 수북이 쌓였다. 

이쯤에서 문득 지난날이 무조건 아름답게 채색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마음의 질병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순간 감정의 주관적 왜곡 현상이 심각할 정도로 내 정신건강을 위협하고 있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긴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 돌아가고 싶은 대상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인간적으로 참 견디기 힘든 고통이긴 하다. 

편지세대의 아날로그 정서가 가끔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용건만 간단히 적어야 할 카톡 메시지가 자주 연애편지 분량만큼 늘어난다. 써놓고 보면 길어져서 고개를 흔들다가도 어느새 습관처럼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또 아차 싶다. 한두 줄로 그치는 편지를 거의 써본 적이 없는 우리 세대의 말과 글은 언제나 구구절절했다. 어쩌면 ‘라떼’의 웃픈 현실은 이런 언어습관이 자초한 업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내 감정에 취해 상대방의 기분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무례함을 반복하기 일쑤였다. 편지세대가 문자세대에게 은근히 외면당하는 것도 사실은 젊은 세대를 짜증 나게 하는 이런 말과 글의 장황함탓이기도 하다. 조심하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 관성의 지배를 받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며칠 전 말기 암 임상시험 환자로 강남 삼성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우리는 성장기의 애틋한 경험을 유난히 많이 공유한 사이였다. 두 손을 맞잡고 그동안의 안부를 묻다가 둘 다 자꾸만 고개를 반대로 돌려야 했다.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와 나는 경주 감포중에서 처음 만나 좋아하던 여학생을 위해 밤새워 쓴 따끈따끈한 손편지를 서로 대신 전해주기도 하던 살가운 친구 사이였다. 꼬깃꼬깃 서너 번이나 접은 편지봉투 속에는 양쪽 친구의 심장 뛰는 소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것을 아릿하게 기억한다. 빡빡머리 남학생과 단발머리 여학생이 주인공인 ‘1970년대 제작’ 흑백영화의 한 장면이었다고나 할까.

그날 밤 병원에서 나는 뜬금없이 내가 너 대신 편지 심부름을 했던, 그 여자 동창은 지금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다. 읍사무소 소재지의 이웃 동네에 살았던 두 사람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 순간 병색이 완연했던 친구가 환한 얼굴로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여자 동창은 우리도 잘 아는 다른 남자 동창과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고 했다. 옛날 생각이 나자 친구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기라도 한 듯 자기가 메신저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여자 동창의 근황을 들려줬다. 그녀는 고향 인근 도시에서 남편과 함께 예쁜 펜션을 운영한다고 했다. 이번엔 내가 그를 향해 싱거운 눈웃음을 보냈다. 그날 밤 우리는 잠시 손편지의 추억에 젖어 웃다가 또 울었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나 보다. 편지세대인 우리에게 어니언스의 명곡 ‘편지’는 언제 들어도 가슴 먹먹한 바로 우리 이야기였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튜브로 노래를 찾아 무한 반복시켰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과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이라는 가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날 이후 어디를 가든 낭만 가객 최백호의 독백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듯하다. 노래꾼은 위로하듯이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성글던 사랑도 풋풋한 우정도 함께 나누던 친구가 없으면, 정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버릴 것만 같아서 두렵다. 갑자기 ‘멍 뚫린 내 가슴’이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잠깐 조는 사이에 친구의 몹쓸 병이 약사보살의 따뜻한 약손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꿈을 꿨다.

허남결 교수 hnk@dongguk.edu

[1701호 / 2023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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