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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 마지막 경지에서는 내가 없다) 

기자명 진우 스님

멸도 있다면 중생 또한 있는 것이니 다시 한 중생 더할 뿐

법이 있다거나 없다는 분별 넘어서야 실로 보살이라 할 수 있어
모든 현상은 바다 같아 고락은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질 뿐
세간 떠나지 않으면서 그대로 해탈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불법 

차안을 넘어서야 하지만 피안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차안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법보신문]
차안을 넘어서야 하지만 피안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차안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법보신문]

아응멸도일체중생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 실멸도자(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멸도에 이르도록 다 제도하였으나, 실은 한 중생도 멸도 된 사람이 없다 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응당 일체중생을 멸도(滅度)하였고, 일체중생이 멸도를 마쳤는 고로, 한 중생도 멸도한 자가 없다고 하심이다. 처음에는 중생이 있다는 분별된 생각으로 멸도를 해야 했으나, 멸도한 후에는 중생이라는 분별도 멸도했다는 분별도 사라졌음이니, 중생과 멸도가 남아 있지 않고 멸도 할 대상이 없게 된 것이다. 만약 멸도가 있다면 중생이 있는 것이니, 다시 한 중생을 더하고 남길 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생과 멸도(滅度)와 멸도견(滅度見)이 있는 마음이 생긴 탓이다. 그러므로 보는 견해가 있으면 다시 한 중생을 짓게 되는 것이요, 멸도를 보는 마음이 있으면 또한 중생을 짓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깨달은 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데서 오는 현상인 것이다. 마음을 깨닫고 보면, 모두가 부처 아닌 것이 없고, 부처라는 분별도 없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인 까닭에,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과 같다 할 것이다. 이에 그 어떤 괴로움도, 아쉬움도, 근심 걱정도, 붙을 곳이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일체중생을 취하고 버리는 것 없이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참 멸도이다. 경의 말씀과 같이, 한 중생도 실은 멸도 할 대상이 없어야 하거늘, 오히려 중생견(衆生見)이 있거나, 멸도견(滅度見) 즉, 중생이라는 분별과 멸도한다는 분별이 있으면 이는 도리어 사상견(四相見) 즉 아(我)·인(人)·중생(衆生)·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짐이다. 이는 실무유법(實無有法) 즉, 법(法)이 있다 없다라는 분별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실로 보살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소견이 있으므로 머무는 마음과 머무는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하는지를 수보리가 묻게 되는 것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근본 뜻을 아직 헤아리지 못함이다. 보살은 멸도에 다시 머물지 말아야 함에도, 멸도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면 중생이라는 분별도 놓지 못함이니, 진정한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그 자체로서, 허망한 생각으로 멸도니, 중생이니, 머문다느니, 항복을 받는다느니, 하는 사량조차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스님!! 정말 다음 세상이 있을까요? 다음 세상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 수 있다” 이다. 무슨 근거일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원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사람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져 왔다. 하늘을 날고 싶으니 비행기가 생겼고, 물속을 들어가고 싶으니 잠수함이 생겼다. 빨리 가고 싶으니 엔진이 생겼고, 무거운 것을 들고 싶으면 기중기와 굴삭기가 만들어졌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진다. 앞으로 원하는 것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세상, 즉 내생(來生)은 정말 있는 것인가?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고, 현재는 다시 과거가 될 것이므로 미래는 반드시 현재로 다가올 것이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이라 했다. 아무리 긴 시간도 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니, 수억겁의 세월도 곧 현재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습성이 현재에 나타나고, 현재의 습성은 미래로 이어지게 된다. 과거 전생의 생각과 감정이 그대로 현재에 이어졌고, 현재의 생각과 감정은 반드시 미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형태와 모습만 변할 뿐, 고락의 인과업(因果業)은 성불하지 않는 한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자유자재가 될 것인가? 물론 그렇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현재의 마음 즉 좋고 싫은 고락의 분별이 그대로 이어지게 되면 그 크기에 따라 인과가 윤회할 것이다. 좋은 만큼 싫고 나쁜 것이 반복된다는 말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득이나 손해는 없다. 다만 생사생멸과 시비고락이 엎치라 뒤치락 할 뿐이다. 이를 업이라 하고 업은 계속 육도(六道-천상, 인간, 수라, 지옥, 아귀, 축생) 윤회하게 된다. 이것저것 다 싫다면 고락의 분별을 없애면 된다. 아예 인과의 싹을 멸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는 않으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부단하게 기도와 참선(參禪), 보시(布施)와 정진(精進)을 이어 나간다면 피안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걸림이 없어지고 인과가 사라져서 고업(苦業-고통의 습관)을 그치게 된다. 해탈열반이다. 진정한 자유자재, 무애자재가 되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게 된다. 이를 부처라 한다. 마음을 깨쳐서 성불하게 된다. 그야말로 아쉬운 것도 없고 원하는 것조차 없다. 역설적으로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진다. 영원히 평안하다.

소이자하 수보리 실무유법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縟多羅三貘三菩提心者)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수보리야! 실제로 어떤 법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된다.

실로 아상견(我相見)과 인상견(人相見), 중생상견(衆生相見), 수자상견(壽者相見))이라는 4자의 소견이 없어서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가히 멸도할 법도 없고, 멸도될 법도 없어서 실로 법이 있지 아니함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또 실로 법이 있지 않으니 아(我)와 법(法-보살법)이 있지 아니함이다. 그러므로 사상견이 있으면 보살이 아닌 까닭으로 법이 있지 않으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이여 참으로 어렵도다. 법이 없다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길이 없고, 법이 있다 하면 이 마음을 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잘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법을 취하기 위해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해 가야하고, 법을 놓는 것은 곧 피안에 도달함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께서는 정법을 뗏목에 비유하신 것이니, 이 법을 취할 수 없는 것과 이 법을 버릴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분명케 하심이다.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실로 법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차안 역시 법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 되는 것이므로, 결국 피안을 다다르지 않고서는 실무유법 즉 법이 없음을 모르는 까닭이다. 따라서 차안과 피안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근기는 차안에서 법이 없다는 것, 즉 실무유법을 아는 것이요, 중근기는 피안에서 실무유법을 아는 것이며, 하근기는 피안의 실무유법에서 끊겨 차안의 가지가지의 모습이 실무유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이다. 즉 외도의 사견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고로 세간의 일거수일투족의 현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그대로 정체를 실현하는 것이 곧 불법이다. 즉 어떤 모습, 어떤 일, 어떤 것을 대하더라도 마음에 걸림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고, 따라서 마음 감정이 1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피안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분별하는 차안이 없다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 있는 차안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피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야 고통의 차안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차안을 넘어서기는 해야 하지만, 피안이라는 생각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생각이 있는 한 차안을 건널 수 없으므로, 차안이라는 생각, 피안이라는 생각을 모두 멸도해야 하는 것이니, 차안이 피안이 되고 피안이 차안이 되어서 차안과 피안이 따로 있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차안에 있으면서도 차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차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에 끄달리지 않아야 곧바로 피안이 저절로 되는 것이니, 차안이 곧 피안이고 피안이 곧 차안이 되는 동시에, 차안과 피안의 분별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위법, 무위법 그리고 마음이라는 삼제(三際)가 모두 공한 실무유법처(實無有法處)가 되면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없는 삼세의 제불(諸佛)과 통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간지옥(無間地獄)을 향하여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삼세제불과 통함이 어떠한가? 이것이 곧 불도를 공부함이다.

세상에는 즐거운 일도 많다. 그리고 괴로운 일도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즐거운 일은 바로 나에게 있었고, 가장 괴로운 일 역시 나에게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이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금 한 돈이 더 큰 법이고, 남 가슴에 대못 박힌 것보다 내 눈에 들어간 티끌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부처님께서는 움직이는 세상 모든 것은 연기작용이라 했다. 우주 법계가 모두 인드라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도 떨어진 것이 없다. 이를 인연이라 한다. 그래서 시비를 논하거나 선후와 생사를 논할 수 없다. 원인은 서로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모두가 연기적 흐름일 따름이다. 바람 불어 파도치는 바다의 일과 같은 것이다. 결국 각자 개개인이 갖는 나만의 좋고 싫은 고락이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좋고 즐거운 것은 나쁘고 괴로운 것에 의해 생기고, 싫고 괴로운 일은 좋고 즐거운 일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생기고 덜 생기지 않는다. 신분에 상관없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마음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더 좋고 즐거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더 싫고 괴로운 것을 찾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비고락을 더욱 따지는 이들은, 스스로 업을 쌓아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니, 이를 알고 마음 수행하는 이들은 그나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가까이하여 괴로움을 덜 받을 것이지만, 이를 모르고 자신의 감정에만 끄달려 탐심을 내어 인과를 쌓는 이들은, 괴로움이 더할 것이다.

좋은 것 나쁜 것은 본래 없다. 더 즐겁고 괴로운 것 또한 본래 없다. 내가 지금 마음이 좋고 즐겁다면 괴로운 일이 곧 생길 것이다. 지금 내가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다면 과거에 좋고 즐거웠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더 좋은 것은 더 나쁜 것이 기다리고 있고, 더 싫고 나쁜 것은 더 좋고 즐거운 것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곧 싫고 나쁜 과보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고락이 반복되는 인과를 벗어나려면 그 어떤 현상, 그 어떤 일에도 즐거운 마음이나 괴로운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분별심을 갖지 말고 연기려니 인과려니, 그러려니 그러려니 하라는 말이다. 연기의 흐름이라고 치부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업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단히 연기와 인과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인욕하며 정진해야 한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01호 / 2023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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