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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에 집착해 빛을 보지 못한다 

기자명 혜민 스님

20. 해를 보지 않고 빛을 보기

빛 가득해도 일정한 모양 없어 
대상의 모습 드러내주는 바탕
견성도 모양 없는 빛과 같아
본성‧불성은 ‘상’ 아님 알아야

해가 한창인 맑은 대낮에 태양을 보지 않고 햇빛을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봐야할까? 도대체 어느 쪽을 봐야 빛을 볼 수가 있을까? 어디에다 시선을 두어야 여기에 지금 빛이 환히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그건 당연히 눈앞에 보이는 일체의 대상에서 그 빛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이 나무이든, 건물이든, 사람이든, 강아지든, 음식이든, 커피든, 자동차든, 그 대상이 보인다면, 바로 거기에 빛이 있다는 증거다. 반대로 칠흑 같이 어두운 암흑 속에 있다면 빛이 없으므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즉, 어떤 대상이 있다고 인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특정한 모양이 없는 빛이 지금 내 눈앞에 가득 충만하게 있기 때문에 어디를 봐도 대상이 다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일반인들은 나무나 강아지, 건물이나 사람을 보았을 때 지금 내가 하나의 빛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 모든 대상의 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어 주는 바탕이 바로 세상을 가득 비추고 있는 빛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모양이 있는 나무나 사람과 같은 대상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가며, 그 대상들만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빛을 보면서도 빛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고 오직 대상들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빛 자체가 특정한 형상이 없는 무형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자체의 정해진 모양이 따로 없고 텅 빈 충만함으로 가득 있기에 상(相)에만 집착하는 일반인에게는 평소에 잘 감지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수행자들이 애타게 찾는 본래성품 자리도 이와 같다. 지금 눈앞에 환하게 펼쳐져 그 어디를 봐도 성품이 아닌 곳이 없는데, 계속해서 모양이 있는 대상들만을 보던 버릇 때문에 아직 견성하지 못한 것이다. 즉 빛을 간절히 보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본인 생각으로 빛은 마치 평소에 보던 나무나 건물 같이 어떤 특정한 모양일 것이라고 상정해 놓고 찾고 있으니 못 찾는 것이다. 우리가 찾는 것이 특정한 모양이 없는 공한 성품을 알아차리는 것인데, 우리 무의식에서는 모양이 있는 어떤 특별하거나 신기한 경험이 깨달음이겠거니 하며 그 경험을  추구하고 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못 찾는 것이다. 

또 다른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매년 5월이 되면 부산 해운대에서는 모래 축제가 펼쳐진다. 한번은 우연하게 그 축제 기간 동안 해운대 해변을 걸어 다닌 적이 있었다. 모래 축제에 참석한 팀들이 해운대 모래로 정말로 신기한 여러 가지 모습을 만들어 냈다. 어떤 팀은 파리의 에펠탑을 만들기도 하고 어느 팀에서는 타지마할 궁전을 만들기도 했다. 뉴욕 자유의 여신상, 모스코바 성바실리 대성당, 이집트 피라미드, 서울에 있는 광화문도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모양을 따라서 보면 하나하나가 다 다른 것들처럼 보이지만, 그 모양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나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이 에펠탑이든 피라미드든 광화문이든 상관없이, 다 같이 하나의 모래로 만들어진 사실이다. 

우리가 찾는 것은 본성, 불성, 자성, 혹은 성품이라고 하는 성(性)을 보려고 하는 것이지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과 같은 모양, 상(相)을 찾는 것이 아니다. 성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늘거나 줄거나, 더럽혀지거나 깨끗해지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은 무상해서 원인과 조건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것이고, 부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해운대 모래 축제에 가서 타지마할 궁전이나 자유의 여신상만을 봤다면 언제든 부수어질 수 있는 상만을 보고 온 것이고, 그것들이 다 모래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도 함께 봤다면 변화하지 않는 성품도 보고 온 것이다. 

‘법화경’의 ‘묘음보살품’을 보면 맨 처음 부처님께서 살상투와 미간에서 광명을 놓으셔서 온 우주에 있는 부처님들의 세계를 살피신다는 부분이 나온다. 공부가 미진했을 때에는 마치 부처님 머리에서 어떤 신비한 빛이 뿅하고 나가는 것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빛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모양이 없는 우리의 앎의 빛이었다. 그 빛으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화초도 분별하고 찻잔도 분별하지 않는가. 항상 부처님 광명 속에서 살면서도 마치 그 광명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나와 같은 실수를 부디 범하지 마시길 바란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01호 / 2023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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