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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조사선의 특질 및 전개(상) 청규 확립

기자명 정운 스님

청규로 불교, 일상성 종교로 전환

청규 제정, 선종 변화 이끌어
선사들 율원에서 독립한 계기
보청법 도입으로 평등한 운력
노동이 곧 수행으로 받아들여

선종의 역사는 끊임없는 동(動)의 역사이다. 선 사상 중 일부는 후대의 요청이 가미된 역사이다. 당시 신수(606∼706)가 오조홍인(601∼674)의 법을 이은 정통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신회(684∼758)의 6조 현창운동으로 인해 혜능을 6조로 받들면서 신수의 선을 방계인 북종(北宗)이라 불렀고, 혜능의 법을 이은 자신은 7조라고 하면서 남종(南宗)이라고 자처했다. 즉 선종의 역사가 신회로 인해 흐름이 바뀌었다. 신회 입적 후, 혜능의 법을 이은 제자라고 자처했던 하택종[신회의 선종]은 5조인 규봉종밀에게서 단멸한다. 그런데 신회가 예상치 못했던 방계라고 할 수 있는 남악계와 청원계로 선종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이렇게 예상치도 않았던 곳으로 선사(禪史)가 흘러가고 있으니, 선종의 역사는 바로 ‘동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마조계에서 발전한 조사선 사상은 선종사의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하였고, 이런 조사선의 특질은 현대 우리나라 조계종의 선 사상이기도 하다. 마조계를 중심으로 조사선의 특질을 다섯 가지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선(禪)의 사법자(嗣法者)가 많다는 사실이다. 달마 이후 혜능에 이르기까지 한 스승이 한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일대일인(一代一人)의 부촉이었다. 그러나 마조·석두 이후, 조사선 시대에는 한 스승이 여러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일대다인(一代多人)의 부촉시대로 전환되었다. 수행자는 구도를 위해 선지식을 찾아다녔고, 스승도 오로지 제자들을 깨우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한편 마조 당시의 선사들은 자신과 인연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서로 다른 선사들에게 보냄으로써 제자들의 심인을 깨우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런 스승들이 있었기에 심인을 얻은 수행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이 선승들로 인해 5가7종의 조사선 선풍이 풍미하는 시대를 초래하였다.

둘째, 청규(淸規) 확립으로 선종의 역사가 전환되었다. 선종에서 청규 제정으로 선종이 율원으로부터 독립하고, 불교가 일상성의 종교화로 전환되었다. 청규는 청정대해 중의 ‘청(淸)’ 글자와 승려가 지켜야 할 규구준승(規矩準繩)의 ‘규(規)’ 글자를 따서 ‘청규’라고 하였다. 즉 선종이 율원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선종교단 자체 내에서 필요했던 조직적인 규칙들을 체계화하여 성문화시킨 규칙이다. 백장이 처음 제정한 청규는 산실되어 원래 그대로는 아니다. 오늘날 ‘경덕전등록’에 ‘선문규식(禪門規式)’을 통해서 처음 제정했을 때의 청규 의미를 알 수 있다. 

① 장로(長老)로 삼아 방장에 거주한다는 것은 개인 침실이 아니라 깨달은 각자(覺者)와 같은 상징적인 이미지를 말한다. ② 불전(佛殿)을 세우지 않고 법당(法堂)만 있게 한다는 것은 선종 사찰에서는 법당이라고 호칭한다. 곧 이 법당은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이 모셔진 곳을 말하지 않는다. 큰 당우에 선상[法床]만 둔다. 방장이 법을 설하는 곳으로 굳이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③ 승려들은 선방에서 법납 순서로 앉으며, 긴 평상에 누울 때는 길상수(吉祥睡)를 한다. 또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④ 선원의 모든 대중은 장로가 법당에서 법을 설할 때, 법문을 들어야 한다. ⑤ 공양은 재죽[齋粥, 밥과 죽]인데, 아침에 죽을 먹고 점심에 밥을 먹는다. ⑥ 모든 대중이 평등하게 운력하는 보청법(普請法)이 실시된다. ⑦ 선원의 특유한 승당 안에서 생활양식의 모든 규범과 의식·절차를 제정한 것에 대해 혹 어길 시에는 유나(維那)가 책임지고 통제한다. 

백장의 청규로 인해 노동하는 일이 수행의 한 차원으로 받아들여져 ‘노동선’이라는 어원이 형성될 정도였다. 노동하는 것 자체도 수행의 한 연장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백장의 청규 제정은 선종사에서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선종 승려들이 율원에 거주함으로써 율원 승려들과 선 수행자들의 생활이 달라서 마찰이 있었는데, 청규확립으로 선사들이 율원에서 독립되어 자유로이 수행할 수 있었다. 둘째는 대중이 평등하게 노동하는 보청법으로 인해 노동과 선을 하나로 보는 데서 일상성의 선이 확립되었다. 셋째는 운력으로 인해 자급자족의 생활에서 형이상학적 신통방술이 아닌 일상성의 종교로 변화한 점이다.

정운 스님 동국대 강사 saribull@hanmail.net

[1701호 / 2023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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