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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63)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9)

아미타신앙 방편으로 삼았던 스승 지엄 영향이 의상에게 그대로 투영

지엄은 극락정토서 연화장세계로 나아가는 2단계 왕생 희구
의상 또한 간결한 아미타경만 주석하며 소극적인 자세 보여
고려 이르러 의상과 아미타불신앙 결부된 신화가 더욱 발전 

당에서 귀국한 의상 스님이 처음으로 화엄교학을 펼친 영주의 부석사. 현재의 모습은 11세기 결응국사의 중창에 의한 것이다.[문화재청]
당에서 귀국한 의상 스님이 처음으로 화엄교학을 펼친 영주의 부석사. 현재의 모습은 11세기 결응국사의 중창에 의한 것이다.[문화재청]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후반 의상이 당의 지엄으로부터 화엄학을 전래하고, 원효가 ‘화엄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화엄학은 신라 통일기의 새 불교를 대표하는 교학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에는 왕경과 지방에 다수의 화엄학승들이 등장하여 서로 다른 연구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 양성과 화엄학 전도에 주력하였던 의상의 법손들이 번성하게 됨으로써 이후 화엄학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법손들에 의해 의상의 화엄학을 조술하는 전통이 확립되었는데, 특히 의상의 주저인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한국의 화엄사상사는 실로 ‘일승법계도’ 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승법계도’에 대한 의상 법손들의 주석서 가운데 실물로써 전해지고 있는 것만을 들어도 의상 법손들의 주석을 모은 것으로 편자 미상의 ‘법계도기총수록’ 4권(13세기 중엽)을 비롯해서 고려 광종 9년(958) 균여가 ‘일승법계도’를 강해한 것을 필록한 ‘일승법계도원통기’ 2권, 조선초기 설잠(김시습)의 ‘화엄일승법계도주’ 1권, 조선후기 도문유문의 ‘법성계과주’ 1권 등인데,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끊임없이 연구돼왔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은 원래 화엄행자로서 실천수행과 제자의 교육을 중시하였고, 학자로서의 저술은 많이 남기지 않았다. 고려후기 의상의 찬술로 전해지던 ‘백화도량발원문’을 주석한 체원의 ‘약해’에 의하면, 스승 지엄이 신라 화엄종을 창립한 의상에게는 의지(義持), 중국의 화엄학을 집대성한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의상은 실천수행자, 법장은 학자적인 면모가 두드러졌던 인물이었음을 스승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추정케 한다. ‘삼국유사’의 찬술자인 일연도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의상전교’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의상은) ‘법계도서인’을 저술하고, 아울러 간략한 주석을 붙여 일승의 중요한 점을 모두 포괄하였으니, 천 년을 두고 보아야 할 귀감이 되어 저마다 다투어 보배로 지니고자 하였다. 나머지는 찬술한 것이 없으니, 한 점의 고기로 온 솥의 국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 화엄경부에는 ‘일승법계도’ 이외에도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그리고 ‘소아미타경부’에는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1권 등 3종이 의상 저술로 수록되어 있다. 이로써 의상은 ‘화엄경’과 ‘십지론’에 의거하여 화엄교학의 핵심(宗要)을 드러낸 ‘일승법계도’와 함께 화엄의 실천내용을 요약한 ‘십문간법관’과 ‘입법계품초기’를 저술하였고, 나아가 아미타정토신앙을 드러낸 ‘소아미타경의기’도 저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승법계도’ 이외의 저술은 모두 일실 되어 내용을 전연 알 수 없음이 유감이다. 이상의 저술 가운데서 ‘입법계품초기’는 스승인 지엄의 ‘입법계품초(入法界品鈔)’ 1권을 주석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의천도 이 두 책을 붙여서 함께 수록하였던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혁련정의 ‘균여전’에 의하면, 균여의 저술 가운데서도 같은 이름, 같은 권수의 ‘입법계품초기’가 적기 되어 있어 어느 기록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두 자료 모두 고려의 초기와 중기의 것이라는 점에서 의상과 균여에게 같은 이름의 저술이 실제 있었는지도 의문시된다. 

그런데 일본의 기무라 기요타가(木村淸孝) 교수는 지엄의 ‘입법계품초’ 찬술 자체를 의문시하고 있어서 의상이나 균여의 저술 문제는 더욱 믿기 어렵게 되었다. 즉 중국의 ‘엄사행장록(嚴師行狀錄’이나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과는 달리 일본의 ‘원초록(圓超錄’이나 ‘영초록(永超錄)’에서는 혜광(慧光)의 저술로서 지엄의 ‘입법계품초’와 같은 이름, 같은 권수의 것이 실려 있기 때문에 양자는 혼동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으며, ‘법계도총수록’에서는 저자를 밝히지 않은 채 ‘입법계품초’를 3곳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인용된 하나의 내용이 ‘화엄경’과 관련이 희박한 불타야사(佛陀耶舍) 번역의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에 의거한 것으로서 지엄이 전연 관심을 두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에 지엄의 저술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일 지엄의 ‘입법계품초’ 찬술 진위 여부가 의심된다면 그 저술에 대한 의상이나 균여의 주석 여부도 이울러 의문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됨은 물론이다. 

한편 의상의 정토신앙에 대해서는 ‘소아미타경의기’라는 저술의 이름과 함께 부석사의 가람구조, 그리고 무량수전에 봉안된 아미타불상 등을 통하여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소아미타경의기’는 일찍이 일실 되어 그 단편조차 확인할 수 없으며, 부석사의 현존 불전이나 불상은 고려 이후의 유적이나 유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자료에 의거한 의상의 정토신앙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토신앙과는 다른 문제이지만, ‘송고승전’ 의상전에 의거한 선묘룡(善妙龍)과 부석(浮石)의 설화가 성립된 연대도 9세기 이전으로는 소급되기 어렵다는 점을 아울러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의상의 정토신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고려될 점으로는 의상의 화엄교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스승 지엄의 정토신앙이다. 지엄은 자신의 수행, 그리고 의상과 법장 등의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임종에 앞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의 이 환구(幻軀)는 인연을 따라가는 무성(無性)이다. 지금 일단 서방정토에 머물고 나중에 연화장세계에 노닐 것이다. 너희들도 나를 따라 이 뜻에 함께하라.” 지엄은 공관에 철저하고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로 나아가는 2단계의 왕생을 희구하였음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화엄신앙에서 궁극적으로는 ‘화엄경’에서 설하는 연화장세계에 왕생하는 것이지만, 잠시 아미타정토에 머무르겠다는 것은 아미타신앙을 과도적이며 방편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의상은 668년 7월 15일 스승 지엄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면서 당 유학 8년 정진의 결산으로서 ‘일승법계도’를 완성하였는데, 그로부터 불과 3개월 뒤인 10월 29일에 스승이 입적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스승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화엄학의 의리를 물어 깨우치고 있었다. 즉 지엄이 입적하기 18일 전인 10월11일에 청담사 반야원에서 보법궤칙(普法軌則)을 수지하는 의미, 그리고 10월 19일에는 연기의 무자성에 대한 의문을 지엄으로부터 깨우치고 있었던 끝에 마침내 임종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의상은 귀국한 뒤 화엄학 강의와 제자 양성을 통하여 스승의 화엄학을 충실히 계승하였는데, 물론 제자들과의 계속된 연찬과 법장 교학의 영향으로 교학에서의 진전과 변화가 없지 않았겠지만, 화엄학의 근본적 입장, 특히 스승의 임종 자리에서 스승이 토로한 2단계의 정토왕생관 같은 신앙은 그대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엄은 ‘공목장’에서 자신의 정토 왕생관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정토의 종류, 왕생의 의미·장소·방법 등을 제시하면서 삼승불교에 속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비하여 일승불교인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의상은 스승 지엄의 이러한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귀국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토의 장엄성과 왕생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한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 대신에 칭념(稱念)을 주로 하는 간결한 내용의 ‘아미타경’을 주석하는데 그쳤던 것을 보아 정토신앙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졌던 것 같다. 만일 이러한 추측이 타당하다면, 의상 당시에 본전의 주불로 아미타불을 봉안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의상 당시의 부석사는 문무왕의 토지와 노비의 보시 제의를 거절하고 탁발로 생활하겠다고 하였다는 것을 보아 일주문부터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세 구획으로 나누어진 장려한 가람의 구조는 아니었을 것이다. 의상은 제자들과 함께 태백산이나 소백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초막이나 동굴에서 소박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60권 ‘화엄경’보다 후대에 이루어진 80권 ‘화엄경’에서, 그리고 더 후대에 이루어진 40권 ‘화엄경’에서 정토에 대한 내용이 증설되어 갔는데, 특히 40권 ‘화엄경’에서는 이전에 없던 보현보살의 10대원을 첨가하고,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의 왕생으로 결론짓고 있었다. 화엄종의 4조 청량징관(738~839)은 40화엄을 주석하여 화엄과 아미타신앙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징관의 정토신앙은 오대산 문수신앙과 함께 신라에도 전래되어 9세기 이후 화엄종의 신앙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8세기 후반 의상의 손제자인 신림에 이르러 교단이 크게 번창하면서 주류 종단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고려초기 선교양종의 교단체제에서 의상 계통의 화엄종이 교종을 주도하는 종파가 되면서 교화 대상이 전국의 각 지역, 모든 계층으로 확대되고, 신앙 내용도 문수보살·보현보살 신앙에서 아미타정토와 관음보살 진신상주 신앙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11세기 전반기에 부석사는 국사를 역임한 결응(964~1053))에 의해 크게 중창되면서 대찰로서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아미타불이 무량수전의 주불로서 봉안되는 것은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종 8년(1064)에 찬술된 ‘부석사원융국사비문’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전해주고 있다. 

“이 절은 의상조사가 중국에 유학하여 지엄의 법등을 전해와서 창건한 것이다. 불전 안에는 오직 아미타불상만을 조성하고 보처보살이 없으며, 탑도 세우지 않았다. 제자가 이에 대해 물으니, 의상조사는 ‘스승 지엄께서 말하시기를, ’일승의 아미타는 열반에 들지 않고 서방정토를 체로 하므로 생멸하는 상이 없다. 그러므로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 관정 수기를 받아 법계에 가득 차는 것을 본다‘고 말씀하였다. 보처(補處)란 빈 것을 보충해 주는 것이다. 부처는 열반에 들지 않아 비는 때가 없다. 그러므로 보처보살이 없고 영탑도 세우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일승의 깊은 뜻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지엄사는 이를 의상조사에게 전했고, 의상조사는 이를 법손에게 전해서 원융국사에게까지 이르렀다.” 

고려 말에는 의상에게 가탁되었던 아미타불 봉안 설화가 더욱 발전하여 아미타불이 있는 방향인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충숙왕 15년(1238) 운묵무기가 찬술한 ‘석가여래행적송’에서는 “앉을 때 서쪽을 등지지 말라”는 구절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덧붙였다. “옛날 의상조사는 오로지 극락을 희구하여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그의 문도 가운데 죄를 범한 비구가 있어 법에 따라 멸빈을 당해 대중을 떠났다. 그는 다른 곳을 돌아다니면서도 스승을 사모하여 스승의 형상을 만들어 등에 지고 다녔다. 스승이 그 소식을 듣고 불러들여 말씀하기를 ‘네가 만약 진실로 나를 기억하였다면 내가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으니, 형상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형상이 서쪽을 등지게 하였더니, 형상이 스스로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하여 앉았다. 스승이 그를 훌륭하게 여겨 죄를 용서하고 거둬들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03호 / 2023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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