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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 마지막 경지에서는 내가 없다) 

기자명 진우 스님

말조차 붙일 수 없으나 방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었다 말해

여래는 오고 감의 흔적이 없으며 법이 있고 없고를 떠난 자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는 바 없는 본래 그러그러함 일컬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감정 다스린다는 점에서 확연히 달라

여래께서 얻은 보리는 법을 여의어서 법이 되는 것이요 얻음을 여의었기 때문에 얻음이 되는 것이다.      [법보신문DB]
여래께서 얻은 보리는 법을 여의어서 법이 되는 것이요 얻음을 여의었기 때문에 얻음이 되는 것이다.      [법보신문DB]

수보리 약유법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연등불 즉불여아수기 여어내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者 燃燈佛 卽佛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이실무유법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고 연등불 여아수기 작시언 여어내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以實無有法 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한다면, 연등불께서 곧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너는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러한 고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 없으므로,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셨느니라.

석가모니께서 연등불 재세시에 선혜보살로 계셨는데, 항원왕이라는 임금이 연등부처님을 청하여 설법을 듣기 위해 성에 들게 하셨으니, 마침 땅이 질퍽질퍽하였다. 이를 본 선혜보살이 머리카락을 땅에 풀어 연등불께서 밟고 오시게 하시니, 이에 연등불께서 수기를 주시며 너는 내세에 부처가 되어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었다. 석가모니의 뜻은 능인적묵(能仁寂默)이다. 능(能)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뜻이고, 인(仁)은 속 씨앗이라는 뜻이다. 행인(杏仁)은 살구씨의 속 씨를 말함이고, 속 씨에서 다시 속 씨의 눈을 가리킴이니, 속 씨의 눈은 생명을 이름이다.

석가모니께서도 마음 중의 마음인 속마음에서 다시 활구적인 생명처를 얻으실 것을 아시고 연등불께서 능인적묵(能仁寂默)이라는 이름을 내리신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수기를 받음에 있어서, 법이 있어 수기를 받는 것 또한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수기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의심을 하였으므로, 다시 설명을 하겠다고 하심이다.

그때 만약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이는 법이 있을 때 얻음이 있을 것이고, 얻음이 있으면 법이 있어서 사상의 분별을 면치 못하였으리니 이러할 시에는 연등불께서 수기를 내리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여래가 얻은 보리는 법을 여의어서 법이 되는 것이요, 얻음을 여의었기 때문에 얻음이 되는 것이니, 실무유법(實無有法), 즉 실로 법이 있다는 것이 없는 것이므로,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등불께서 수기를 내리신 것이다. 따라서 실무유법은 무유법(無有法)을 여읜 것을 말하고, 무도 유도 모두 여읜 것을 말함이다. 유만 여의고 무를 여읠 줄 모르면 다시 유법이 되는 고로, 유는 무가 있어야 하고, 무는 유가 있어야 함이니, 어느 하나만을 여의어서는 실무유법이 아니 됨이다.

그러므로 단상외도(斷常外道)나 단견외도(斷見外道)의 마구니가 되기 쉬운 것이다. 불자들은 이 실무유법에서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함이니, 유무양변(有無兩邊)을 여의면서도 삼제(三際-과거, 현재, 미래)에 들지도 말아야 함이다. 단멸에 떨어지지도 말고, 비유비무(非有非無)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며, 영지불매(靈智不昧-진리에 들어)하여 유에서 그러그러하고, 무에서도 그러그러하여 어디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러하여 스스로 걸림이 없어야 하느니, 유를 떼고 붙일 것도 없고, 무도 여의고 붙일 것도 없다. 불법을 이루고 이루지 않고도 없어야 함이다. 이것을 실무유법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 감정의 연속이다. 자신에 대해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싫고 나쁜 말을 들으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좋아하게 되고,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싫어지게 된다. 하지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싫은 말을 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그러니 좋은 말을 하는 사람만 생길 수는 없다. 여기서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나 나쁜 말을 하는 이는 삼라만상의 인드라망 속에서 연기하며 인연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는 인과인데 좋고 싫은 고락 감정의 업이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나의 좋은 감정의 분별에 의해 인연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나쁜 말을 하는 사람 역시 나의 싫은 감정의 분별에 의해 인연 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연기하여 나타나는 인연과 그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나의 고락 감정의 업을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좋은 사람은 나의 고락 분별심에서 생기게 되고, 싫은 사람 역시 나의 고락 분별심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좋고 싫은 사람으로 분별하여 보일 때는, 나의 고락 감정의 업식에서 나온 그림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기보다 나의 고락 감정의 업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좋고 싫은 고락 감정의 인과업을 멸도해야만 마음이 평화롭게 된다. 그 어떤 대상이나 인연들은 연기에 의해 오고 가는 것이므로, 이러한 연기 인연에 대해 시비 고락하는 것은, 곧 나의 분별심에 의해 나타난 그림자에 대해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듣거나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저 인연 연기로구나’ 하고 분별 감정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 여의 약유인 언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실무유법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何以故 如來者 卽諸法 如義 若有人 言如來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라고 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다.

여래(如來)는 그러그러하여 ‘여여(如如)하다’ 는 뜻이다. 오고 감의 흔적이 없음을 말함이다.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가 그러그러함이요, 본성청정(本性淸淨)이 그러함이요, 이러고 저러고가 모두 그러그러함이다. 온갖 감정이 그러그러하여 그친 상태이다. 한결같이 그러그러함이니, 법이 있고 없고를 떠난 자리이며, 공하여 공리(空理)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음이다. 무엇이 되었던 오는 것이 없고 가는 것도 없으니 그러그러함이다. 이를 이름하여 여래라 한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게 됨은, 실로 법이 있고 없고가 없이 그러그러함이니, 이를 실무유법(實無有法)이라 이름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것이다. 이는 무슨 까닭이냐? 일체상(一切相)을 여의어 다함이 없는 자성을 밝히게 되면, 제법성(諸法性)이 공한 일여진경(一如眞境)에 이르게 되고,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다함이 없이 깨끗하며, 일체법을 두지 않고 일체법 위에서 그러그러히 평등하여, 같지도 다르지도 않는 것을 이름 하여 여래라 함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이는 옳은 생각이 아니다. 이러한 사람은 여래라는 뜻을 알지 못함이니, 실로 법이 있지 않으므로 부처님께서 아뇩다람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과 말로서는 ‘얻음이 없다’라고 하는 생각과 말을 하는 그 순간조차도 얻음이 생겨 버리기 때문에, 본래 말조차도 붙일 수 없으나, 중생의 생각에 맞추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라고 억지로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보리 여래 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시중 무실무허 시고 여래설일체법 개시불법(須菩提 如來 所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수보리야! 여래(如來)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속에는 참된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모든 법은 다 불법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은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그러그러함인지라, 아(我)와 법과 득(得)과 득처(得處)가 따로 있지 않을지니, 가히 얻은 바가 없는 무실(無實)인 것이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삼라만상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님이 없을 지라, 어느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공덕이 아닐 것이며, 어느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묘색(妙色)이 아니겠는가. 이를 무허(無虛) 라고 한다. 이에 또 다시 유무를 일으키어 허(虛)하지 않은 진실상(眞實相)이 드러남이고, 이에 인과법을 여의었으니 실한 것이다. 이는 만고를 전후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며, 시방의 곳곳 즉 법처(法處)를 통하여 일여(一如)한 것이며,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따로 택하지 않는 것이며, 사상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허하지 않는 무허(無虛)라 할 것이다.

또 다시 무릇 삼라만상의 일체법과 일체상이 모두 실제성이 없으므로, 구름과 바람, 꿈과 그림자와 이슬, 번개와 무지개 같이 허망하고 실하지 않음이다. 이러한 법이 가로로 보나 세로로 보나 무실무허(無實無虛)일 것이니,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여래가 얻은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는 실도 없고 허도 없다 함이다. 또한 이 법은 실로 상이 없으니 허함이요, 진여의 체성이니 허함도 없다. 따라서 이렇게 해도 말이 되고 저렇게 해도 말이 되는지라, 왜냐? 이 법은 정법(正法)이지만 정법이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시비가 없음이다. 왜냐하면 실(實)이 없다함은 곧 옳음이 없는 것이요, 허가 없다함은 그름이 없는 까닭이다.

이런 연고로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것이 다 불법이라 하시었다. 즉 허함이 없으므로 불법이요, 실함이 없으므로 불법인 것이다. 불법은 일체의 법을 두지 않으므로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감정을 일으키면 좋고 싫은 고락(苦樂)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여(如)·몽(夢)·환(幻)·포(泡)·영(影)·로(露)·전(電), 즉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은 것이어서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무실무허(無實無虛)이니 그러고 마는 것이다.

다만 고통과 괴로움을 여의려면 이를 즉시 깨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여실히 관하여 분별 집착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평소에 불법을 좀 안다하는 사람들이 막상 자신의 일에 닥치게 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마음공부깨나 한다는 수행자들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따라서 마음 수행을 머리로 해서는 안 된다.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크게 일치하지 않는다.

참선을 수십 년간 한 이들이나, 수십년 간 기도 불공하고 덕 높은 스님께 수많은 법문을 들어온 불자들일지라도, 막상 자기 문제에 다다라서는 일반 범부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왜 생기는 걸까? 참선할 때나 기도 불공을 할 때,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법(緣起法)과 인과법(因果法), 그리고 공과 반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생각부터 앞서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하는 마음이나 성불에 집착하는 마음은 집착이라는 면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06호 / 2023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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