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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등잔과 거울이 말해준 것

어떤 불행도 우리를 완전히 쇠락시키지 못한다

날카로운 비유법 안에서 모든 사물은 심오한 이치 설하는 수단
등잔과 거울 비유는 이 세계가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 나타내
세계의 심연에선 선과 악, 고통과 즐거움의 극적인 균형 유지돼

부처님에게는 이 사바세계 또한 우주의 깊은 심연에서 관철되는 어떤 섭리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사진은 무한의 방.
부처님에게는 이 사바세계 또한 우주의 깊은 심연에서 관철되는 어떤 섭리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사진은 무한의 방.

최근 들어 세상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 가지 사물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것은 등잔과 거울이다. 미륵의 후예들은 이 세계의 어떤 비밀스런 본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것을 자주 비유로 든다. 나 또한 같은 이유에서 그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개인적 사연을 하나 덧붙이자면,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들이 나로 하여금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게 되는 이곳이 진정 어떤 곳인지 다시 사색해 보도록 만들었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뿌리 깊은 우환 의식이 다시 고개를 드는 시절에는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인 양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라고 말하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전 글에서 간간이 언급된 바 있는 이 세계의 본성 말고도 그 밖의 또 다른 의미가 있는지를 자꾸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어떤 교훈을 들려주는 비유적 설법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될수록 저 사물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고, 내가 그것들로부터 들은 (혹은 들었다고 생각된) 어떤 설법이 나와 타인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미륵의 후예들이라면 유식(唯識)의 이치가 최초로 그것을 설한 자의 개인적 영광을 넘어서서 인류의 보편적 기억 속에 길이 남을 것이라 믿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 교리를 납득시키기 위해 자주 호출되는 세상의 어떤 사물들도 인류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머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령 꽃, 물, 등불, 거울 등과 같은 것 말이다. 나는 하나의 무상한 사물들이 저 영속적이고 비가시적인 이치를 비유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놀란다. 날카로운 비유법 안에서 그 사물들이 스스로 심오한 이치를 설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내가 마치 잠시 베일을 벗은 무언의 설법자를 엿본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성전의 비유들이 선사하는 순간적 영감에 제대로 부응하질 못한다. 주석학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문장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추론하는 순간 어떤 비유의 경이로움과 효과를 덧없이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심심찮게 보았던 비유 속의 사물들이 나의 꿈속에서 저절로 싹을 틔우고 자라나서 언젠가 이 세계의 진짜 이름과 의미를 알려주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믿는 것이다. 그런 믿음에 나름 교리적 근거가 있기는 하다. 미륵의 후예들에 따르면, 부처님의 깨달음 속에 알려진 궁극의 진리를 제외하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비유적 표현 혹은 은유[假說, upacāra]를 통해 알려질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궁극의 진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유사하지 않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유사성[似]을 통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불’은 성질이 사납고 안색이 곧잘 붉어지는 사람과 유사성을 띠고, ‘소’는 우둔한 사람과 유사성을 띤다. 그래서 ‘불’이나 ‘소’라는 비유로 어떤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물은 이 세계 전체를 비유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등잔과 거울이다.

먼저 한 방안에 등불이 켜져 있고 그 불빛이 온 방을 두루 비추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마치 등불의 광명이 비추는 곳에서 방안의 사물들이 환히 드러나는 것처럼, 중생의 알아차리는 마음속에 항상 그의 몸과 세계가 나타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식(識) 안에 있다’고 말한다.(‘유가사지론’ 제56권) 다음에는 크기와 모양을 확정할 수 없는 깨끗한 거울이 있고 그 표면에 온갖 영상들이 나타나 있다고 상상해 보자. 마치 거울을 보고 있으면서 ‘나는 지금 얼굴을 본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자기 마음(=거울)과 별도로 자기 마음에 현현된 온갖 영상(=세계)이 바깥에 실재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저 깊은 차원에서 말하면, 실은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다.(‘해심밀경’ 제3권)

이상으로 저 두 사물이 미륵의 후예들에게 설해준 ‘유식’의 이치를 전달하였지만, 나는 과연 그들이 그 이치를 알게 됨으로써 진정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여전히 이 사바세계는 참고 견뎌야 하는 곳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고, 그것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어떤 이들은 지옥의 고통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세상일에 무심한 방관자가 되지 못했지만, 그런 사람을 좋게 보지도 않는다.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가지고 다시 등잔과 거울로 돌아가 보았다. 만약 등잔과 거울이 세계를 비유적으로 드러낸다면, 다시 이 세계 자체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가령 시방세계를 관하는 어떤 부처님은 이 사바세계를 유사한 예로 들어 ‘시방의 무수한 국토가 또한 이와 같다’라고 설하실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이 사바세계 또한 우주의 깊은 심연에서 관철되는 어떤 섭리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등불의 밝기에 따라 사물이 달리 드러나듯, 그 심연의 섭리라는 것이 내게는 이런 것으로 보인다. 마치 거울 속의 영상이 좌우가 뒤바뀐 것처럼, 이 사바세계에서는 모든 형상들이 거꾸로 나타난다. 불교도들이 누누이 강조하듯,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보고, 고통을 즐거움이라 여기며, ‘나’가 없는데도 ‘나’라고 집착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헤아린다. 또 세상에서 한때 정의롭고 선한 것 혹은 소중했던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사바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자기의 진짜 이름을 갖고 있지 않고, 어떤 행위가 진정 무슨 의미를 갖는지도 확정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는 왕자가 거지로 뒤바뀌고, 거리의 청소부가 실은 삼계의 왕으로 드러나며, 어떤 사람들은 미래에 누릴 천상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에 끔찍한 지옥의 고통을 겪는다. 

이쯤에서 나의 이야기를 멈춰야겠다. 저 사물들로부터 들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지어낸 상상에 불과한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빠져들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 내게 위안이 될 만한 잠정적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저 우주의 심연, 즉 중생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과 악 혹은 고통과 즐거움 등의 어려운 균형이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서는 그 어떤 불행도 그 어떤 폭군도 우리를 완전히 쇠락시키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당분간 이런 생각으로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저 우주의 비밀스런 섭리상 미래의 어느 날엔 그런 생각도 힘을 잃고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706호 / 2023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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