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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현(불각심·27) 사경수행 - 하

기자명 법보

외경 세계에 뻗었던 에너지
고요한 내면 세계 전환시켜
팍팍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 확보

사경을 하다 보면 가끔 명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 순간에는 온전히 나와 종이 위에 글씨밖에 없다. 천천히 획을 그으며 움직이는 붓펜 잡은 손과 눈앞에 보이는 글자들에 집중하면, 마치 달마대사가 벽을 보고 마음을 통찰하는 ‘벽관수행’을 하는 것처럼 글자로 향하던 시선이 종이에 반사돼 내 마음 상태를 비추는 효과를 경험한다. 

사경에 집중하다가도 잡다한 망념들이 올라오면 그 망념의 에너지를 피하지 않고, 글자를 쓰면서 그대로 보고 느낀다. 그렇게 마음을 관찰하다 보면 속으로 ‘내가 혼자 공부한다고 힘들었구나’ ‘그동안 외로웠구나’ 등 나의 마음 상태를 직시하면서 스스로와 소통하기도 한다. 사경수행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인간관계, 가라앉지 않는 잡념과 같은 외경 세계의 대상을 향해 뻗었던 집중의 에너지를 글을 쓰는 ‘행위’를 매개로 삼아 고요한 내면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기능이 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뒤늦게서야 어머니가 말씀하신 사경의 ‘신령스러운 힘’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이해됐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영적인 힘’보다는 글자를 쓰는 ‘행위’에 의지해 내 마음을 집중하고 관찰할 때 향상되는 ‘감정 조절 능력에서 비롯된 힘’이었다. 

사경의 장점은 온전히 나 자신과의 시간을 갖는 기회라는 것이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는 지극한 내향인이라서 밖에서 여러 상황에 치이거나 머리가 혼잡하면 놀러갈 힘조차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주로 사경을 하며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경은 ‘수행’이자 ‘휴식’이다. 무엇보다 한자 쓰는 일이 재밌다. 지금까지 내가 사경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다. 단 몇 번의 사경으로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또는 일주일에 한 번이든 상관없이 꾸준히만 하면 그만큼 팍팍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마음을 살피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 그보다 좋은 이점은 없는 것 같다.

나는 2년간, 540번 가까이 ‘반야심경’을 사경했다. 올해 6월에는 ‘금강경’을 사경했고, 현재는 ‘법화경’ 사경을  이어오고 있다. 효과적인 사경을 하기 위한 요건으로 나는 집중이 잘 되는 환경 조성과 시간대 파악, 의도적으로 집중하려는 노력, 이 세 가지를 꼽는다. 보통 저녁 10시즈음 사경을 시작한다. 한 차례 몸을 시원하게 씻은 뒤, 편한 잠옷 바람으로 오로지 스탠드 불에만 의지한다. 온전히 내가 사경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사경을 시작하면 집중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천천히 글을 쓰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왕이면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음악은 되도록 안 듣는 것이다. 또 10분, 30분 시간을 정해서 최대한 집중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왕이면 개인적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기복적인 마음보다 나와 주변 사람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사경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경이란, 단순히 부처님의 경전을 베끼는 것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나를 포함한 일체중생의 어려움을 통찰하고, 힘듦을 나눌 줄 아는 부처의 마음을 닮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경에 처음 입문한 계기는 비록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심이었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사경이 좋아서 하고 있다. 이렇게 4년이 되도록 사경을 지속할 수 있게 된 것은 진실로 어머니의 역할이 참 크다. 

‘법화경’에서 유명한 에피소드인 ‘삼거화택(三車火宅)의 비유’를 빌려 표현하자면, 나이 많은 장자(長者)가 어머니였고 불길에 휩싸인 저택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아이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양과 사슴과 소의 수레 대신 자본주의 시대에 맞게 지극히 세속적인 방식으로 사경의 세계로 인도해주셨지만, 덕분에 사경하는 습관 하나는 제대로 갖추게 됐다.

결론적으로는 미혹한 마음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셨던 것임을, 지금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한참 힘들었을 때,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더한 잔소리를 하셨을 법도 하건만, 그 대신에 사경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주신 어머니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708호 / 2023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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