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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화승은 어디로 갔을까

  • 데스크칼럼
  • 입력 2024.01.08 15:32
  • 수정 2024.01.10 18:16
  • 호수 1711
  • 댓글 1

선승 일변 풍토 속 화승 단절로
​​​​​​​경전 이해 없는 사찰 벽화 난무
벽화 단순 장엄 아닌 그림 법문
올바른 조성·전승도 전법 일환

김해 정암사 주지 법상 스님은 사찰 주련과 벽화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역이다. 스님의 저서 ‘사찰에서 만나는 주련’(문학연대, 2022)과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문학연대, 2023)는 전국 170여 곳의 사찰을 직접 답사하며 수집한 자료의 방대함뿐 아니라 경전, 선어록 등을 토대로 벽화와 주련의 내용을 풀이한 꼼꼼함과 안목이 돋보이는 책이다. 사찰과 암자를 일일이 순례하며 벽화와 주련을 확인하고 이를 촬영하는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두 권의 저서에 담긴 시간과 노력을 가늠할 수 있다.

법상 스님이 이런 고된 작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성지 순례 도중 접한 스리랑카 사찰의 벽화였다. 부처님 전생담과 일대기를 비롯한 경전 속 이야기의 정수를 명료하게 담아낸 스리랑카 사찰 벽화는 마치 그림으로 보는 경전과도 같았다. 귀국 후 스님은 전국 사찰을 답사하며 벽화를 살폈다. 그 과정에서 주련에도 눈길이 머물러 작업의 영역이 주련으로까지 확대됐다. 그렇게 6년 여의 긴 여정 끝에 탄생한 것이 두 권의 책이다. 

이 가운데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의 서문에서는 사찰 벽화에 대한 스님의 각별한 관심 애정,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안타까움이 느껴져 눈길을 끈다. 

“경전의 내용을 그린 벽화도 자세히 보면 엉터리에 가까운 벽화가 아주 많다. 이는 벽화를 그리는 화공이 그만큼 경전을 보지 아니하고 벽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하여도 근본적인 책임은 화승의 명맥을 단절시킨 우리나라 불교에 있다. 그러한 빌미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불교는 원래 다양성을 추구하여 구도하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선승 외에는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방면의 구도 행위를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다.”

스님은 방방곡곡 사찰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이 “시나브로 공부가 익어지는 기쁨의 시간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벽화 하나하나의 내용을 살피며 그 속에 담긴 가르침을 확인하는 그 자체가 수행의 여정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 상당수 사찰의 벽화가 불자들에게 그러한 공부의 자료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 원인이 한국불교의 획일화 된 수행 풍토와도 맞닿아 있다는 분석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부처님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되기 전 그림과 조각은 언어가 건널 수 없는 시간을 통과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문자와 경전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림과 조각은 중요했다.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 경전을 지닐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찰의 벽화와 조각은 언제나 열려있는 법석이었다. 특히 그림은 아주 오랜 세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기에 출가자들은 벽화 조성을 또 다른 수행으로 삼았고 재가불자들은 가장 큰 공덕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글자를 모르는 민중들을 위해 사찰에서는 벽화를 그리고 경전에 변상도를 넣었다. 오늘날에도 외국인들이나 불교를 모르는 비불자들에게 사찰의 벽화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쉬운 방편으로 유효하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불교에서 경을 보고 가르치는 강사는 화두 잡는 수좌보다 아랫자리로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염불이나 절은 화두 참구에 비해 하근기의 수행으로 여겨졌다. 사경이나 사불은 ‘재가자나 하는 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화승과 조각승 또한 점차 사라지고 ‘불모(佛母)’라는 이름은 불상을 조성하거나 수리하는 특정 직업군의 대명사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불교는 그림으로, 조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던 수많은 스승들을 잃어버린 셈이다. 

부처님께선 ‘법화경’에서 “여러 방편으로 미묘한 법을 설해 중생이 환희심을 발하도록 했다”며 “어떤 사람에게는 부처의 과거 인연담을 설하고, 어떤 이에게는 부처의 분신을 보여주었으며, 어떤 중생에게는 다른 부처의 화신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하셨다.
 

남수연 국장
남수연 국장

획일화는 편견이나 타성과 맞닿아 있다. 다양성이 무너지면 유연성이 사라진다. 시대 요구에 부응하기 어려워 도태되기도 십상이다. 부처님께서 숱한 방편을 사용하셨듯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조각하는 것 또한 수행이자 전법이다. 화승이 속속 출현하고 그들이 온전히 존중받는 시대. 그것이 불교중흥이며 곧 불교의 전성기다.

namsy@beopbo.com

[1711호 / 2024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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