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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라는 말이 근대종교를 만든 것은 아니다

고착된 개념이 ‘인식 전진’ 막아 

일본어 ‘슈코’ 번역 차용하며
1883년 ‘종교’ 단어 첫 등장
‘학’ ‘술’ 여과하고 ‘교’로 편제
종교가 겪고 있는 모순 탐색

말은 내밀하게 의식에 스며들어 인식을 장악한다. “너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게다가 다수가 그런 말을 사실처럼 내뱉을 때, 그 말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포승이 되고 감옥이 되어 나를 묶고 감금한다. 나는 한국 근대종교사도 똑같이 말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역사적 사실로 행세하는 많은 언어와 개념이 인식의 전진을 방해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한국종교학계에서는 1883년 11월 10일자 ‘한성순보’ 제2호 ‘구라파주’ 기사에 실린 ‘종교(宗敎)’라는 말이 종교 개념의 첫 등장 사례라고 서술하곤 했다. 최근에는 이보다 몇 달 빨리 유길준이 ‘세계대세론’에서 ‘종교’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발견’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경우 1868년 4월 3일자 외교 문서의 번역문에서 ‘종교’라는 번역어가 처음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보인다. ‘한성순보’든 유길준이든 ‘슈쿄’라는 일본 번역어를 차용하여 ‘종교’라는 말을 쓴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종교학 안에서 1883년은 중요한 연도로 거론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종교라는 번역어의 첫 등장이 일으킨 어떤 논란이나 사건도 없다. 따라서 학문적인 서술 안에서만 이 연대는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적절하게 자료의 가치를 과장하고 특정 사건의 의미를 확대하는 학문적인 관행에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라는 번역어의 기원을 중시하는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번역어의 사용과 개념의 등장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1883년이면 이미 조선에는 ‘교(敎)’와 ‘교문(敎門)’ 같은 개념 아래 불교, 유교, 개신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을 포괄할 수 있는 분류법이 존재했고, 일반 범주로서 ‘교’라는 개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예컨대 천주교는 학(學), 교(敎), 술(術)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요동치고 있었다.

‘종교’라는 말의 등장 이전에 이미 종교 개념이 서서히 구축되고 있었지만, 아직은 이것을 ‘종교’라는 말로 번역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릴리전(religion)’을 굳이 종교라고 번역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우연의 산물인 번역어의 최초 출현에 집착할 때 우리는 번역어의 등장 이전에 서서히 형성되고 있던 종교 개념의 문제를 과소평가하게 될 우려가 있다. 당시에 이미 서구 종교를 포괄하는 종교 개념의 형성 과정이 새로운 번역어의 도래를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번역어의 출현을 종교 개념의 등장으로 오인할 때 발생하는 그다음 문제는 ‘종교 개념’과 ‘근대적인 종교 개념’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혼란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종교들을 분류하기 위한 포괄적인 범주로서 ‘종교’는 학문적인 개념에 가깝다. 

그러나 근대적인 종교 개념은 신교의 자유, 포교의 자유, 정교분리의 조건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근대적인 종교는 ‘학’과 ‘술’을 여과하고 남은 ‘교’를 중심으로 편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 개념’과 ‘근대적인 종교 개념’을 구분하지 않을 때 근대종교사의 가장 중요한 흐름을 놓치게 될 우려가 있다. 

신교의 자유, 포교의 자유, 정교분리는 매우 정치적이면서도 모순적인 개념이다. 한편으로 정교분리는 종교를 비정치적인 영역으로 추방한다. 그러나 정부에 의해  ‘종교’로 인정받는 종교라야 신교와 포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정치적인 종교만이 근대국가 안에서 ‘근대 종교’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모순을 겪고 있다.

우리는 특정 사건에 의해 종교문화의 급변을 설명하는 ‘빠른 종교사’를 선호한다. 그러나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단 하나의 언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은 학문적이지 않은, 사실은 매우 종교적인 기대의 산물이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상당히 느린 속도로 근대종교사의 여러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우리의 인식을 제약하는 말의 감옥에서 탈옥할 수 있는 열쇠를 찾는 데 주력할 것이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11호 / 2024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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