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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명 오동환

세속과 출세간 뒤엉킨 장안의 불교와 미술 

안세고 장안에 당도한 시점이 중국불교 본격적인 시작점
서역로로 통하는 지리적 특징…동아시아 불교 전파 주류
당대 불교 중심 장안…140여 사찰·각국 승려 운집해 활동

대자은사 북쪽에서 바라본 시안 전경. 당대에는 자은사 대안탑이 도성의 남쪽에 자리하였으나, 도시가 확장된 오늘날에는 시안의 중심이 되었다. [사진출처 摄图网]

안식국(安息國·Parthia, BC 240~AD  226)의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안세고는 득도 후 여러 나라를 유행하며 홍법에 힘썼다. 그가 언제 중국 땅을 밟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출삼장기집’의 기록은 후한 환제(147~167년 재위) 초에 장안에 입성하였다고 전한다. 안세고는 그로부터 약 20여 년간 장안에 머물며 35부 41권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후한 명제(57~75년 재위)가 꿈에서 부처님의 상호를 뵌 후 가섭마등과 축법란을 낙양에서 맞이하여 백마사를 세우고 ‘42장경’을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진위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하나의 외래 종교가 정착하려면 경전의 번역이 수반되어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헌의 기록으로 볼 때 안세고는 최초로 조직적 역경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 인물이니, 그렇다면 중국불교의 본격적인 시작은 안세고가 장안에 당도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장안(長安)은 현 샨시성(陝西省) 시안의 옛 이름으로, ‘치세가 오래도록 평안(長治久安)’하기를 기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장안은 고대 중국의 수도로서 역사가 깊다. 주·진·한·수·당 등 중국 역사상 강성했던 국가들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여러 이민족을 포함한 역대 13개 왕조가 장안을 도성으로 삼았다. 지도에서 장안의 위치를 보면 중국 전체 국토에서 서북으로 편향된 곳에 자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경제의 중심이 바뀐 오늘날 이곳을 시안(西安)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 많은 왕조가 장안을 도읍으로 삼았을까?

장안은 사계절이 뚜렷하면서도, 기후가 비교적 온난하다. 광활한 관중평원의 복판에 자리하고, 북으로는 위수(渭水)가 흐르며, 여덟 줄기의 지류가 도시를 휘감고 있다. 남으로는 진령(秦嶺)산맥이 길고도 두텁게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식량과 자원을 확보하기 쉽고, 외세의 침입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하며, 또 동으로 나아가면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대륙의 각지로 진출하기가 쉽다. 시인 두보가 “자고로 제왕의 땅”이라고 칭하였듯, 나라의 도성으로 삼기에 적합한 지리 요건이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장안의 지리적 특징은 서쪽으로 나아가면 서역으로 통한다는 점이다. 장안에서 서행(西行)하여 하서주랑을 통과하면 돈황에 닿고, 다시 서행하여 천산남북로를 거치면 아시아와 유럽의 각국으로 이어진다. 고대 중국은 이 길을 따라 문물을 주고받으며 이른바 ‘실크로드’라는 장대한 동서교역로를 형성하였고,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키울 수 있었다. 특히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서북을 평정하고 안서도호부를 설치하면서, 보다 안정되고 적극적인 교역에 나설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장안 도성 서쪽에 열린 서시(西市)에는 온갖 다채로운 사람과 물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왕정백이 읊은 “새벽 북소리에 벌써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저녁 북소리에도 돌아가 쉴 생각을 않네. 산 넘고 바다 건너 만국에서 몰려와, 앞다투어 황금과 비단을 바치네”(왕정백 ‘장안도’)라는 구절은 당시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서 장안의 열기를 생생히 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불교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날 동아시아 불교 전파에 다양한 경로가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지만, 주류가 서역로였음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다. 헤아릴 수 없는 고승들이 홍법과 구법을 위해 이 길을 오갔다. 불교가 담고 있는 사상과 내용은 중국의 통치자와 민중 모두에게 매력적이었다. 5호16국 시대에 분열된 하서주랑의 각국은 구마라집을 모시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고, 마침내 후진(後秦)의 요흥에게 모셔져 장안에 당도하였다(401년). 법현은 장안에서 출발해(399년) 하서주랑을 지나 서역로로 인도에 들어갔고, 혜초는 반대로 해로로 들어가서 서역로를 통해 장안으로 돌아왔다. 현장은 장안에서 서역로를 따라 인도로 향했으며, 다시 그 길을 따라 장안으로 돌아왔다(645년). 의정은 배를 타고 인도로 들어가서 다시 해로로 돌아왔지만, 그의 종착지 역시 장안이었다(695년). 

중국불교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시기 역시 당대이고, 당대 불교의 중심은 장안이었다. 이 시기 장안에는 도성과 남쪽의 종남산(終南山)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운영되었는데, 문헌상 확인되는 곳만 해도 약 140개 소에 이른다. 이밖에도 “장안(도성)에는 삼천의 금세계가 있고, 종남산에는 백만의 옥루대가 있다(長安三千金世界 南山百萬玉樓臺)”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찰이 곳곳에 즐비하였다. 이 사찰들에서는 비단 중국 승려들뿐 아니라, 인도·중앙아시아·한국·일본을 포함한 각국의 승려들이 운집하여 역경·강설·구법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또 종파를 이루었다. 이 시기 장안의 불교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노자의 후예를 자칭한 당 황실의 ‘도선불후(道先佛後)’ 정책으로 도교와 첨예한 대립의 각을 세우기도 하고, 무측천 집정시기 왜곡된 정치적 선전물로 악용되기도 하였으며, 회창법난에는 잔혹한 폐불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본 연재는 앞으로 세속과 출세간이 뒤엉킨 이 장안의 불교와 미술을 다루고자 한다. 그 이야기의 중점은 당대의 사찰이라는 시공간이 될 것이다. 그때의 사찰 가운데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지는 곳도 있지만, 어떤 곳은 세월의 풍파에 터만 남고, 어떤 곳은 문명에 떠밀려 땅속에 묻혔다. 그때의 인물들은 이미 온데간데없지만, 공간이 주는 현장감은 세월에 상관없이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곳에 머물던 인물과 사건들을 되짚다 보면 이 장안이라는 공간에서 그들이 엮였던 인드라망을 입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 역대의 장안, 그리고 현재의 시안 사이에는 행정구역상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본 연재에서는 넓은 범위의 ‘장안불교문화권역’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 고유명사에 대해서는 되도록 친숙한 한자어를 사용하고, 현대의 인물과 지역에 국한해 중국병음로 표기하려고 한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duggy11@naver.com

[1711호 / 2024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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