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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67)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23)

의상의 관음신앙·낙산사 창건 구체적 검토 없는 수용 비판받아 마땅

관음신앙·낙산사 창건은 일승법계도 사상적 내용에 부합되지 않아
낙산사에 있었다는 여의보주는 고려사에도 실려 역사적 사실 확실
낙산사에 관음·정취보살 함께 모신 것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따른 것

삼국유사 고판본(정덕본) 권3, 탑상제4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선조. [서울대 규장각]
삼국유사 고판본(정덕본) 권3, 탑상제4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선조. [서울대 규장각]

의상의 관음신앙 자료로는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와 승 익장(益莊)이 찬술한 ‘낙산사기문’(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조), 그리고 의상의 찬술로 전해져 온 ‘백화도량발원문’이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기본적인 사료로 활용되어 온 이들 자료 가운데 ‘백화도량발원문’이 문헌학적인 검토를 통해 의상의 진찬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됨으로써 의상의 관음신앙에 대한 이해는 원천적으로 재검토를 요구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백화도량발원문’은 고려 충숙~충혜왕대(1313~1344)에 활약한 체원(體元)이 충숙왕 15년(1328) 10월에 주해하여 충숙왕 복위3년(1334) 7월에 ‘백화도량발원문약해’라는 제목으로 간행함으로써 알려지게 된 문헌이다. 물론 체원은 ‘백화도량발원문’이 의상이 지은 글임을 자신의 저술에서 명기하고 있었던 바와 같이 의상의 진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체원이 활동한 사찰은 해인사를 중심으로 인근의 법수사와 반룡사, 경주의 동천사 등인데, 그가 고려초기 균여의 화엄종을 계승하였고, 더욱 소급해서는 신라 의상의 화엄종 계통에 속한 인물로서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의 찬술로 전해오는 ‘백화도량발원문’을 주목한 나머지 그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고 간행하여 유포시키려고 하였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깊이 추구하면 간행 유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체원의 개인적인 신앙의 선택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관음신앙을 요구하였던 14세기 전반기의 불교계 상황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불교사학계에서는 ‘백화도량발원문’의 문헌학·사상적인 검토를 통해서 의상의 주저인 ‘화엄일승법계도’와의 사상적인 연관성이나 ‘수능엄경’과의 관계 등과의 사상적인 내용 문제, 그리고 ‘백화도량’이나 ‘원통삼매(圓通三昧)’ 등의 용어 문제 등을 지적하여 의상이 찬술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의상의 사상과 신앙을 계승한 후대인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 시기는 일러도 의상이 입적한 지 100여 년 뒤인 9세기 초를 소급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까지 제시되었다. 그러나 후대 의상에게 가탁한 ‘백화도량발원문’을 찬술하는 시기의 불교계 상황과 관음신앙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아직 이루어진 바가 없다. 그리고 ‘백화도량발원문’의 내용이 의상의 사상이나 신앙을 반영하거나 계승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의상의 ‘백화도량발원문’ 찬술 배경이 되는 “의상이 동해의 성굴(聖崛)을 찾아가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낙산에 관음소조상을 봉안하는 불전을 지었다”는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에 의거하여 의상의 관음신앙과 낙산사의 창건 조사로서의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 이외의, 의상의 전기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인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와 ‘송고승전 의상전’을 비롯해서 여타 의상의 행적에 대한 자료들에서는 의상의 관음신앙과 낙산사 창건의 행적에 관련된 언급을 일체 찾을 수 없다. 현존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의상의 행적 가운데서는 관음굴을 찾고 낙산사를 창건하는 행적이 끼어들 여지가 전연 없게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의상의 행적을 ‘일승법계도’의 사상적인 내용과 함께 검토할 때는 오히려 관음신앙이나 낙산사 창건 사실은 부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학계에서 의상의 관음신앙에 관한 유일한 자료인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낙산사 창건설화(승 익장의 낙산사기문의 내용은 낙산이성조의 내용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붙여서 함께 취급)를 본격적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정확한 사실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전연 없다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연구방법의 문제로서 사찰의 창건 설화가 전해주는 설화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시도가 전연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모순과 한계를 반성하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써 우선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 내용을 분석하고, 이어 그러한 설화가 성립된 불교사적 배경을 추구하는 것이 본고 집필의 목표이다.

나는 앞서 156회와 157회 2회에 걸쳐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의 전문을 인용하면서 해석을 시도한 바 있었다. 그 결과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 인용한 고본(古本)에서는 헌안왕 2년(858) 2월 15일 선종 9산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한 범일(梵日)이 석상으로 된 정취보살을 다리 밑 물속에서 찾아내서 낙산의 위에 불전을 짓고 봉안하였다는 내용의 설화를 먼저 수록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이어 의상과 원효에 관련된 설화는 연대를 밝히지 않은 채로 뒤에 붙여서 서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의상이 관음보살의 바위굴 속으로 인도되어 진신을 친견하고 그 계시를 받아 관음보살의 소조상을 조성하여 낙산 위의 불전에 봉안하고 떠났으며, 다시 뒤에 관음보살을 친견하려던 원효는 관음굴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로 떠나버렸다는 서술로 끝마침으로써 3인에 관련된 설화가 각각 별개로 창작되어 나열된 복합적인 구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3인 가운데서 특히 의상은 관음진신의 친견과 낙산사 창건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반면에 원효는 의상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의 역할에 그친 인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런데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는 범일·의상·원효 3인에 관한 설화에 이어 고려시대 낙산사의 수난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첫 번째 수난은 범일이 정취보살을 봉안한 불전을 세운지 100여 년 뒤에 들불로 낙산사가 소실되어 두 불전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재가 일어난 시기가 범일에 의한 정취보살의 봉안이 이루어진 지 100여 년 뒤였다는 표현에 의하면 광종 9년(950) 즈음인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데, 그 연대는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낙산사의 역사를 신라 시기와 고려 시기로 확연히 구분하여 사실상 고려 시기에 시작된 것임을 의미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본다. 두 번째 수난은 고종 41년(1254) 몽골의 침입으로 낙산사가 소실된 사건인데, 이때 낙산사에는 정취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이 각각 봉안되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두 보살상 이외에 일찍이 의상이 관음굴에서 관음보살로부터 받았다는 수정염주, 그리고 동해의 용으로부터 받았다는 여의보주 등 두 보주가 실제 전승되고 있었음을 확인케 해주고 있다. 그런데 고종대(1214~1259)에 활약한 승려 익장이 찬술한 ‘낙산사기문’에서는 범일의 정취보살상에 관한 내용과 원효에 관한 설화 내용이 모두 제외되어 있다. 그리고 의상의 관음보살 진신을 친견한 설화와 함께 관음보살상의 소재가 소조에서 옥으로 바뀌어 서술되었고, 수정염주와 여의보주의 행방에 관한 사실이 특기되었다. 특히 두 보주는 두 보살상보다도 주목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몽골의 약탈을 면하여 전전한 끝에 명주성을 거쳐 마침내 고종 45년(1258) 어부(御府, 內殿)에 보관되기에 이르렀던 사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여의보주에 관한 사실은 ‘고려사’27에도 실려있음이 흥미롭다. 즉 원종 14년(1273) 3월 원에 가는 대장군 송분(宋玢, ?~1318)으로 하여금 낙산사의 관음여의주를 원의 황후에게 바치게 하였다는 내용인데, 이 보주가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를 토대로 하여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가 성립되는 경위와 전승되는 과정을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전기 낙산사에는 관음보살소조상과 정취보살석상을 각각 봉안한 불전이 두 채가 있었는데, 몽골 침략 이후에는 관음보살상만을 모시는 사찰로 바뀌었으며, 이때 특히 사찰의 보물로써 전승되어 오던 수정염주와 여의보주가 특히 주목 대상이 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라 말기인 9세기 중반, 아니면 고려 전기인 10세기 중반부터 봉안되어 오던 두 보살상과 두 보주를 소재로 한 연기설화가 구성되면서 당시 불교계의 주류 종단으로 대두된 화엄종의 조사로서 크게 추앙받고 있던 의상이 낙산사 창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반면 화엄종에서 정통조사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원효를 조역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주역인 의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석조의 정취보살상을 소재로 한 설화에서는 선종 9산 가운데 낙산 소재의 강원도 일대에서 커다란 교세를 떨치고 있던 사굴산파의 범일을 등장시키게 되었는데,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가 성립된 초기에는 의상의 관음보살상 조성 설화에 앞서 맨 처음에 기록된 ‘고본(古本)’이 전승되었다. 그런데 일연(1206~1289)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고본’에서의 낙산사의 연기설화 부분을 의상-원효-범일의 순서로 바꿔 서술하였다.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는 일연 자신이 범일과 의상의 순서를 바꾼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였다. “고본에는 범일의 사적이 앞에 실려있고, 의상과 원효 두 법사의 (사적이) 뒤에 적혀 있으나, 살펴보면 의상과 원효 두 법사의 일은 당 고종 때(650~683) 있었고, 범일은 회창(841~846) 이후이니 서로 떨어지기가 170여 년이나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앞 기사를 뒤로 물려 차례를 바로잡아 엮었다. 혹은 범일을 의상의 문인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지금까지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가 성립되는 과정을 추정하여 보았는데, 물론 무리한 억측과 논리적 비약이 없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상의 관음신앙과 그 전승과정에 대해서 지나치게 안이한 인식과 접근의 차원에 머문 학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없지 않다. 결론적으로 낙산사 창건의 조사로 등장하는 의상과 원효, 그리고 범일 등 3인 가운데서 범일의 정취보살 석상의 봉안 설화는 구체적인 사실과 분명한 연대를 명기한 서술내용으로 보아 사실성 여부를 쉽게 판정하기 어렵지만, 의상과 원효에 관련된 연기설화는 확실히 역사적 사실성이 결여한 설화적인 허구의 자료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첨부할 내용은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이 함께 묶인 이유이다. 고려시대 낙산사에 봉안되어 오던 관음보살의 소조상과 정취보살의 석상이 의상의 관음보살상 조성과 범일의 정취보살상 조성의 연기설화가 성립되는 근거가 되었음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낙산사의 창건 설화에서 다른 두 설화가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두 보살상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80화엄경 입법계품’과 ‘40화엄경’에서는 장자의 아들인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인의 선지식을 찾는 구법여행 중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28번째, 정취보살(正趣菩薩)은 29번째 만나게 되는데, 관자재보살은 보살의 대비행(大悲行)의 법문을 설한 다음, 정취보살에게 찾아가서 예의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어떻게 보살도를 닦느냐?”고 물으라고 권유하였고, 선재동자는 그 가르침에 따라 정취보살에게 가서 보살의 보문속질행(普門速疾行)의 법문을 들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입법계품’의 관음신앙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의상의 관음신앙과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를 성립시키는 역사적 배경으로써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관음신앙을 검토하게 될 때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12호 / 2024년 1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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