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8. 일체동관분(一切同觀分 - 온갖 것을 분별없이 하나로 봄) 

기자명 진우 스님

중생은 감정으로 살아가고 부처는 분별 사라진 중도로 살아간다

보살·연각·성문은 감정 끄달리지 않지만 잔업 남아 부처와 달라
체는 걸림 없는 본성이요 용은 걸림없는 체가 그림자로 비친 것
그림자가 실제인 줄 알고 잡으려 하면 허공 향한 헛손질과 같아

여여는  분별 없는 중도를 말한다. 공짜는 없고 대가는 필수다. 무언가 움켜쥐려고 하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법보신문DB]
여여는  분별 없는 중도를 말한다. 공짜는 없고 대가는 필수다. 무언가 움켜쥐려고 하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법보신문DB]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육안(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肉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천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천안(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天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혜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혜안(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慧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법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법안(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法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불안(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佛眼) “수보리야!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불안이 있습니다.”

육안(肉眼)은 육체에 있는 눈으로서 평범한 사람이 보는 눈이다. 빛이 없거나 저 너머에 있는 것은 볼 수 없다. 천안(天眼)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다. 빛이 없어도 볼 수 있고, 아무리 작은 것도 볼 수 있으며, 아무리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눈이다. 혜안(慧眼)은 공(空)의 이치를 알아서 실상(實相)의 모든 모습과 모양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비춰볼 줄 아는 눈이다. 그래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눈을 가진다. 법안(法眼)은 모든 공의 법을 요달하고 통달함으로써 일체법을 설명할 줄 알아서, 중생의 잘못된 눈으로 보는 헛된 법을 깨뜨리는 눈이다. 불안(佛眼)은 불성(佛性)이 원융(圓融)하다는 것을 보는 눈으로서, 내외의 모든 법을 통달해 아는 눈이다. 그렇다면 불안(佛眼)이란 실상체(實相體)의 모든 것을 훤히 볼 수 있는 원명(圓明)한 눈이요, 법안(法眼)은 세속법(世俗法)을 여실히 잘 아는 눈이요, 혜안(慧眼)은 공을 능히 헤아려 보는 눈이요, 천안(天眼)은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눈이요, 육안(肉眼)은 보는 것만 보는 눈이다.

천천만천구만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오만가지의 성질과 성품, 스타일과 개성으로 살아간다. 나는 어떤 색깔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색깔의 마음이 가장 좋은 것일까? 아무리 많은 색깔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보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뉜다. 엄밀히 분류하면 사람과 부처로 나뉘게 된다. 사람은 감정으로 살아가고 부처는 감정이 멸도(滅度)된, 이름하여 중도(中道)의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중도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렇게 여여할 뿐이다. 또 사람은 감정의 업을 크게 가진 사람과, 감정의 업을 작게 가진 사람으로 나뉜다. 감정이 클수록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이 크고, 감정이 작을수록 고락의 업이 작다. 고락의 업이 큰 사람은 좋고 즐거운 마음도 크지만, 싫고 괴로운 마음도 크다. 또 고락의 업이 작은 사람은 좋고 즐거운 감정도 작지만 싫고 괴로운 마음도 작다.

고락업(苦樂業)의 감정이 큰 사람은 천상에 있을지라도 좋고 싫은 감정이 크게 나타나고, 고락업의 감정이 작은 사람은 지옥에 있을지라도 좋고 싫은 감정이 작다. 다만 좋고 싫을 때의 시절 인연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므로, 좋은 업이 나타날 때는 극락이 되고, 싫은 업이 나타날 때는 지옥이 된다. 사람들은 무조건 좋은 조건을 가지려 한다. 하지만 인과(因果)로 인하여 싫고 나쁜 조건의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는 것을 간과한다. 이를 여실히 잘 아는 이를 보살(菩薩), 연각(緣覺), 성문(聲聞)이라 한다. 그러므로 감정을 잘 절제할 줄 안다. 그러나 잔업(殘業)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부처는 아직 아니다.

따라서 생활하면서도 나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살펴야 한다. 어떤 조건과 인연에 의해 감정이 좋아져서 즐겁고 기쁜 마음이 든다면, 인과(因果)를 관(觀)함으로써 다음에 괴롭고 슬픈 과보(果報)가 생길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채야 한다. 그래서 즐거움이라는 분별심(分別心)에서 벗어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또 싫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는 인과(因果)를 관함으로써 다음의 시절인연(時節因緣)에 즐거움과 기쁨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채서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분별심에서 벗어나 괴롭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감정이라는 업의 인과(因果)를 항상 관함으로써, 오고 가는 연기(緣起)의 모습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맡겨서, 매사를 여유롭고 여여한 마음으로 늘 평화로움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처님과 연기(緣起)와 인과(因果)라는 신장(神將)님께 맡기고 신심을 키워 나가야 한다.

앞에서 이 법이라는 것에 대해 사상(四相)이 공하고, 사상견(四相見)이 공함으로써, 아(我-나)와 법(法), 득(得-얻음)과 처(處-장소), 명(名)과 설(說-설법), 해석과 지혜, 보살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공하여, 중생을 중생으로 보지 아니하고, 내가 보살임을 자처하지 아니하고, 불토가 깨끗하다는 것조차 보지 아니함으로, 일체가 아견(我見), 법견(法見)이 없을지니, 그러하게 보지 않는 그 이름을 여래(如來)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법을 보지 아니함으로 보는 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다섯 가지 눈이 구족해서 어긋남이 없으시므로, 이러한 다섯 가지 눈, 오안이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보심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여래께서는 화신(化身)으로 관찰하시는 육안(肉眼)이 있고, 대천세계를 두루 다 보시는 천안(天眼)이 있고, 지혜가 밝으신 혜안(慧眼)이 있으시고, 모든 법의 공함을 아시는 법안(法眼)이 있으시며, 자성(自性)을 항상 깨치신 불안(佛眼)이 있을지니, 어찌 여래께서 보시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모든 법의 공함을 통달 요달(了達)하셨다 하더라도 그 견해가 있을 것이며, 반야지(般若智)가 항상 밝은 상명(常明)일지라도 이 또한 견해이시요, 자성을 항상 깨치고 계실지라도 깨침으로 보는 견해가 있을 것이요, 항차 삼천세계를 보신다든가 목전의 모든 경계를 보신다든가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 않는가? 이같이 여래께서는 다섯 종류의 눈이 구족하시어 물질과 법을 보시고 성품과 이치를 보시는 것이 분명하시거늘, 어찌하여 설법하시는 모든 법과 모든 법지견(法知見)이 공했다고 하시었을까?

이와 같은 것들이 모든 대중들이 의심한다는 것을 미리 아시고, 이를 밝히시려고 걸리지 않는 말씀을 설토하기 위해 수보리에게 묻고 수보리의 대답을 나오게 하시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물으심으로써 이 뜻이 더욱 요긴하게 되고, 수보리는 대답을 통하여 의심나는 곳을 더욱 밝혀 나가는 효과가 생긴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오안(五眼)이 구족하심에도 부처님께서 생각하는 오안과 대중이 생각하는 오안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체성(體性)은 오히려 같음으로써 도리어 실무유법(實無有法)인 줄 모르더냐? 하는 뜻이 이러한 물음에서 긴요함을 가르치심이다. 이같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꿈을 꾸는 듯이 보이는 것은, 수보리는 체(體)를 잡아서 용(用)을 의심한 탓이요, 부처님께서는 용(用)을 잡아 체(體)를 드러내려 하심이니, 즉 용(用)이 즉 체(體)임을 알리시려 함이다. 체(體)는 걸림이 없는 본성(本性)이고, 용(用)은 걸림 없는 체(體)가 그림자로 비친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실제인 줄 알고 잡으려 하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 것과 같음이다.

“스님!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요. 매사에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요.” “아! 그래요? 뭐가 그리 못마땅할까요?” “하는 일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요.”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 당장 힘들어서 그렇지요.” “그러니까 평소에 기도도 좀 하시고 참선도 하고 아끼지 말고 보시도 좀 하시지 그랬어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요? 내가 싫은 건 무조건 멀리하려 하고 욕심만 채우려 한다면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나를 위한 정성을 좀 들이시지요?”

스트레스를 현대병이라 한다. 복잡한 세상을 살다 보면 하나같이 마음에 부담이 오게 된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멘탈이 흔들리면서 급기야 몸까지 상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아무리 좋은 금덩어리라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평소에 시간을 좀 내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조금씩이라도 해야 한다.

감정에 끄달리다 보면 욕심이라는 놈이 끝없이 요구를 하게 된다. 욕심이 원하는 것을 다 채워 주지 못하게 되면, 욕심이라는 놈은 몹시 화를 내면서 좋은 마음을 가만히 놔두지를 않고 못살게 군다. 그래서 좋은 마음조차도 화가 나게 만들며 결국은 괴로워지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욕심을 달래주어야 한다. 욕심을 달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게 되면 편안해진다. 그러려면 기도로서 정성을 들이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기도는 욕심을 잠재우고 평안하게 하여 소욕지족(少慾知足)의 마음을 갖게 한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든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만든다.

기도하는 방법은 염불, 독경, 불공, 참회, 참배, 주력, 정근 등 어느 것을 선택해도 좋다. 다만 인과를 철저히 믿고 모든 것을 무조건 부처님께 맡기는 마음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욕하면서 깊은 신심을 가져야 한다. 안 되는 것은 없다. 다만 안 된다고 하는 욕심이 문제이니, 욕심을 달래는 방법은 기도가 최고다. 참선과 보시도 함께 하면 기도의 효험이 배가된다. 정성을 들이지 않고 욕심만 부리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효과도 없다. 우선 오방내외(五方內外) 신장님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천지신장(天地神將)으로부터 도움도 받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욕심의 반은 보시를 해야 한다. 그것이 공평하다. 그러니 공짜는 없고 대가는 필수라서 움켜쥐는 만큼 힘이 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13호 / 2024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