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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유마경’에 입각해 일상선 정립

기자명 정운 스님

일상이 곧 깨달음의 도량

유마거사 “앉는 것만이 아닌
일상 하나하나가 좌선” 강조
마조에 의해 확립된 일상선
혜해·황벽선사 등으로 이어져

‘조론’의 저자, 승조(僧肇, 384∼413)는 ‘도량’이라는 말을 ‘한가롭고 편안하게 수도하는 장소’라고 주석을 붙이고 고요히 마음 편안하게 수행하는 어떤 장소이든 간에 그곳이 깨달을 수 있는 장소라고 명명하였다. 승조는 이렇게 도량을 해석하고 있는데, ‘도량=마음자리’라는 공식으로 봐도 된다. ‘유마경’에서 ‘도량을 가꾸는데,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굳이 고요한 숲속에 머물러야 선을 하는 것이 아니며, 수행하기 적합한 장소에서만 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머무는 일상에서,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가 바로 부처의 행(行)을 하는 도량인 것이다. 현재 걸음을 걷고 있는 그 자리가 깨달음의 도량이며, 누워 있는 그곳이 깨달음의 도량이고, 앉아 있는 그 자리가 깨달음의 도량이며, 서 있는 그 자리가 깨달음의 도량이다. 이런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이 모두 정각의 자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유마경’에 유마거사가 사리불 존자에게 이렇게 꾸짖는 부분이 있다. “사리불님! 반드시 앉아 있는 것만을 갖고 좌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삼계에 몸과 뜻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좌선이고, 멸진정에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위의를 나타내는 것이 좌선입니다. 도법을 버리지 않고 범부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고,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좌선입니다.” 

현실에 살면서도 몸과 마음에 동요되지 않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고요함에 빠지지 않고 외부로도 흩어지지 않는 것이 좌선이며,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이다. 굳이 앉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 어떤 위치에 처해 있든 간에 그 자체의 행동 하나하나가 좌선하는 것과 다름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하택신회(670∼762)가 주목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신회는 ‘유마경’의 이 부분에 입각해 대통신수(606∼706) 문하 ‘북종선 사람들이 양반다리로 앉아 있는 좌선 자세에 치우쳐 있다’며 통렬히 비판했다. 신회는 혜능의 행화지가 남방 지역임을 착안해 ‘남종’이라고 하고, 신수계가 활동했던 지역이 북방임을 착안해 ‘북종’이라고 명명했다. 여기까지 괜찮은데, 신회는 북종계의 선을 점수(漸修)라며 근기가 낮은 이미지로 낙인찍었다. 그러면서 혜능선을 돈오(頓悟)라고 하면서 북종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것으로 이미지화했다. 이렇게 신회에 의해 “남종선=돈오”가 공식화되었고,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남종선’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신회계 제자들의 법맥이 단절되면서 선종사에서 신회는 ‘지해종도(知解宗徒)’라는 낙인이 찍혔다.

마조의 법을 받은 대주혜해(?∼?)도 마조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혜해에게 “수행자가 오직 좌선만을 하고 있는데, (모든) 행위를 할 때에도 선(禪)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혜해는 “그대가 지금 말한 선이란 오로지 앉거나 다니거나 머물거나 눕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나 모든 때에 항상 쉼이 없는 것을 말한다”라고 답했다. 곧 혜해는 행주좌와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몸과 마음이 평상심에 머물러 있을 것을 강조한다. 마조의 3세 황벽(?∼850)도 ‘전심법요’에서 “마음은 견문각지(見聞覺知)에 속하지 않지만 견문각지를 여의지도 않는다. 견문각지에서 마음을 찾지도 말고, 견문각지를 여의고서 법을 취하지도 말라. 마음이 자유자재해 도량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불성·본성을 여의지 않으며, 그 본성을 전제로 하는 현실의 일상생활 그 자체가 불행(佛行)인 것이다. 일상의 삶, 일상의 행위 그 자체를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청정심을 본래 구족(具足)하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마조는 ‘유마경’에 언급된 “범부 행도 아니요, 성현의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대들이 행동하고, 머물러 있으며, 앉아 있고, 누워 있는 등 어떤 행위에 따라 접하는 모든 것이 바로 도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일상에서 선이 평상심으로 전개됨을 뜻한다. 지금 현재 살아 있는 현실, 그 시간과 그 자리를 절대 긍정화하고 있다.

정운 스님 대승불전연구소장 saribull@hanmail.net

[1714호 / 2024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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