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육성취

대승경전, 깨달음 경지에서 성립

육성취는 경전들 공통된 형식
대승경전도 육성취 구조 수용
부처님과 동일한 깨달음 이룬
이름 없는 부처님들이 편찬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경전의 첫머리는 공통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 육성취(六成就)라고 불리는 서술 방식이다. 육성취란  여섯 가지 조건을 만족하게 갖추었다는 의미이다. 믿음을 나타내는 신성취(信成就), 들음을 나타내는 문성취(聞成就), 시간을 나타내는 시성취(時成就), 설법의 주체를 나타내는 주성취(主成就), 장소를 나타내는 처성취(處成就), 설법 대상을 나타내는 중성취(衆成就)가 그것이다.

‘해심밀경’의 경우 첫머리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가장 뛰어난  광명으로 장엄한 곳에 머무르시니 이곳에 큰 보살 마하살이 구름처럼 모였으며 한량없는 천과 용을 비롯해 호법신들이 모여들었다’고 시작한다. 여기서 ‘이와 같이’는 신성취, ‘내가 들었다’는 문성취, ‘한때’는 시성취, ‘세존’은 주성취, ‘가장 뛰어난 빛으로 광명으로 장엄한 곳’은 처성취, ‘큰 보살 마하살과 천과 용’은 중성취가 된다.

이 같은 경전의 형식에는 심심미묘한 의취(意趣)가 숨겨져 있다. 부처님 말씀을 정리하거나 인증해 암송 또는 편찬하는 작업을 결집이라고 한다. 최초의 결집은 부처님이 대열반에 드신 직후 마하가섭 존자의 주도하에 500명의 아라한이 라자그리하 칠엽굴에 모여 이뤄졌다. 이때 경(經)은 아난존자가 암송한 내용을, 율(律)은 우빨리존자가 암송한 내용을 오백 아라한이 추인하는 방식을 거쳐 결집이 완성됐다.

이런 결집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최초 결집이 이루어진 수백 년 후에도 몇 차례 결집은 행해졌고, 그때마다 새로운 경전들이 출현하였다. 주로 대승의 경전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경전들은 최초 결집과는 다른 인물들에 의해 행해졌고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비록 이 경전들이 후대에 결집됐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아 밝히신 진리의 맥은 변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핵심인 연기와 무아의 이치를 관통하면서 갖가지 교리들을 심층적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후대 경전들은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에 의해 들은 내용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승의 경전들은 부처님과 동일한 깨달음을 이룬 드러나지 않은 인물들에 의해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초기불교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대승비불설론’은 역사적으로 타당할지는 모르나 초역사적·초공간적인 진제(眞際)의 입장에선 독단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대승의 시각에서는 도리어 대승경전이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진리를 완전히 드러낸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초기 결집 경전들은 미완성의 교의로 볼 수 있다.

실제 대승의 경전들은 전반적인 면에서 초기 결집의 경전들과는 다른 해석을 보인다. 불타관·보살관·세계관·생사관·열반관·번뇌관·수행관 등 모든 면이 초기 결집 때의 진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대승에서는 초기 결집에서 가르친 교리들을 ‘소승’이라 규정하고 결정된 교의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초기 결집만의 가르침들을 진정한 불설(佛說)로 여기는 이들은 소승이란 언어를 쓰는 것을 매우 불편해하나 이는 대승경전 전반에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해심밀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공을 초월해 깨달음을 성취한 이름없는 어느 부처님이 자신의 경지를 석가모니 부처님께 회향하고 이를 전통적인 육성취의 방식으로 경전을 편찬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측면에서 앞으로도 이러한 형식의 경전들이 시대에 따라 세상에 출현해야 한다고 본다. 타종교와는 달리 불교의 교의는 이를 조금도 거부하거나 비토하지 않는다. 초기 결집의 전승을 이어받았다는 니까야 중심의 초기불교 신봉자들로서는 필자의 견해를 망령된 사견이라고 힐책할 수 있다. 또 ‘해심밀경’의 교설들을 비불설로 규정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유식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과 ‘대승입능가경’은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들이 눈에 띈다. 아울러 그들은 대승의 심식인 칠식과 팔식, 불성을 부처님은 말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들을 따르고 안 따르는 것은 각자 몫이겠지만  대승의 ‘여시아문’에 대한 입장은 알고 있어야 하기에 거론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714호 / 2024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